오늘도 욕심 한가득 품고

가방이 전하는 삶의 무게

by 맑은하늘


나는 항상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 슬픔, 외로움, 절망감마저 보듬어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가지각색의 감정을 담고 보듬어주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나의 짐을 말없이 품어주는 가방이 떠올랐다.



내 마음속 반짝이던 순간

내 인생 최고의 가방은 유치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뭇가지마저 움츠리던 추위가 가고 새싹이 하나 둘 기지개 켜며 빼꼼 얼굴을 내놓던 즈음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날에 엄마가 사 오신 새 옷들을 동생하고 신나게 입어봤다. 옷을 꺼내자 빈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 할머니께서 가방을 만들어주셨다. 동생하고 나는 할머니 옆에 바싹 붙어 앉아 한 땀 한 땀 가방 만드는 손을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바라봤다. 귀여운 손주들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며 할머니 얼굴에도 웃음꽃이 번졌다.


세상에! 늘 버리기만 하던 상자가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니! 우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완성된 가방을 받아 들고 신나서 유치원 차를 타러 뛰어갔다. 만나는 사람들한테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가방이라고 자랑하느라 하루 종일 신이 났다. 얼마나 자랑했으면 너도 나도 가방을 매 보다가 하원 전에 잃어버렸다. 이 가방은 내 곁에 단 몇 시간만 머물렀지만 할머니의 사랑이 듬뿍 담겼기에 아직도 생각하면 행복이 충만하게 온몸을 감싼다.



늘 무언가에 짓눌리는 나

세월이 흘러 어느덧 먹고 노는 것이 전부였던 유치원을 졸업했다. 학교에 입학하니 공부하는 의무감만큼 책가방이 무거워졌다. 집에 가서 펴보지도 않을 책들을 무겁게 들고 매일 학교로 생각 없이 향했다. 한여름에는 가방 무게 때문인지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어깨가 점점 더 짓눌려 내가 땅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시간을 견디며 빨리 공부로부터 해방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며 그 무게는 한순간에 날아갔다. 모든 의무를 끝낸 나의 가방은 예쁘고 튀기만 하면 되는 패션 아이템으로 변했다. 하지만 삶의 무게에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학생 때는 어깨를 짓누르던 공부에 대한 의무감이 사회인이 되니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변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신입사원 시절에 원가절감한다고 내가 맡은 품목을 임의로 변경했다가 공장 라인이 설뻔했다. 내가 맡은 제품에 체결되는 다른 제품의 담당자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조립이 안 된 것이다. 3일 동안 악몽같이 동분서주하여 일을 빨리 수습했다. 그 이후로 내 선택의 무게를 실감하며 회사에서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된 것이다.


직장에서 책임지는 일이 많아질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익숙함도 함께 자라났다. 일에 대한 책임감이 한도 끝도 없이 자라지 않기에 모두들 참고 일하나 보다.



어른이라는 인생이 주는 무게

회사에서 고군분투하던 중에 나는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회사에서 짊어졌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엄마라는 책임감을 어깨에 지기 시작했다. 나의 작고 예쁜 가방들은 큰 기저귀 가방이 되어 내 어깨를 다시 짓눌렀다. 내가 낳은 아기에 대한 자발적인 책임감으로 이때는 가방이 무거워도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지금은 아이들이 자라서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으로 내 어깨를 짓누른다. 책을 조금만 빌려오려고 가벼운 가방을 들고나갔다 돌아오면 어느새 어깨에 두 줄의 피멍이 들어있다. 집을 도서관처럼 책으로 도배한 것도 모자라 도서관에 가면 책을 욕심껏 가득 빌려온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잘 읽지는 못한다. 나와 다르게 책을 좋아하며 독서가 삶인 아이들을 보면 어깨에 멍이 들어도 신바람이 난다.


나는 언제나 가방을 든다. 나이와 상황에 따라 크기와 무게가 달라졌지만 가방은 항상 내 손, 또는 어깨에 드리워져 있다. 살면서 무언가를 더 원할 수록 내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진다. 가방이 어깨에 전하는 무게가 삶에 대한 내 욕심에 비례하는 것 같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심, 인정받고 싶은 욕심,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욕심... 내 삶에 욕심이 사라지는 날이 올까? 미래는 알 수 없으니 현재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욕심 가득하게 책을 들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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