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웅, 우리 할아버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by 맑은하늘


우리 할아버지는 하얀색 베레모, 흰 정장, 백구두가 잘 어울리는 백의 신사셨다. 할아버지 머리는 항상 높이 떠있어서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지고 키도 큰 할아버지와 길을 나설 때면 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하얀 천사는 우리한테 최고의 할아버지셨다. 유치원 때 설날이면 모두에게 1년 동안 쓰고도 남을 미술용품을 사주셨다. 수채화 물감, 붓, 팔레트, 연필, 톰보우 지우개, 크레파스 등이 쇼핑백 안에서 춤을 췄다. 그리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해의 설날에는 특별히 3년 치를 선물 받으며 우리의 의식이 끝났다. 8살이 되던 해의 설날에 나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기를 기도했다.


유치원 때 사촌오빠랑 할머니 할아버지 옛날 사진을 몰래 꺼내 본 적이 있다. 사진에서 영화배우 같은 남자가 계속 보였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오빠한테 물었다. 오빠가 할아버지 젊었을 적 사진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할아버지도 젊었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영원히 어린이이고,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던 시절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해서 외갓집에 자주 놀러 갔다. 내가 아홉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할아버지 방에서 동생이랑 같이 티비 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할아버지가 외출 준비를 하셨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의 왼쪽 다리 허벅지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나를 보고 할아버지가 6.25 때 총에 맞은 상처라고 알려주셨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지금도 총알 파편이 보인다고 덤덤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입원하셔서 내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어떤 분이 들어오셔서 우리의 침묵을 깼다.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손녀한테 6.25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시는지 물으셨다. 할아버지는 손녀가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하셨다. 그분이 가신 후 할아버지한테 전쟁에 관해 여쭤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재미없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말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는 천국에 가셨다. 나랑 60살 차이 나는 띠동갑이기에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싸우시던 상황을 처음으로 상상했었다. 대학생인 나이에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전쟁터에 나가 총을 겨누셨다. 다리에 총을 맞고 병상에 누워 두려움에 떨었을 할아버지를 가서 안아주고 싶다. 사진 속에서 배우같이 멋있던 젊은 시절에도 다리에 소용돌이 상처는 함께였다. 나처럼 상처를 보고 놀랐을 사람들에게 애써 태연하게 대처했을 할아버지의 한을 보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고등학교 때의 병실로 돌아가 할아버지한테 6.25 전쟁 이야기를 듣고 아픔을 같이 나누고 싶다. 전쟁터에서 총을 맞고도 햇살같이 밝았던 우리 할아버지가 너무나 그립다.

keyword
이전 02화오늘도 욕심 한가득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