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한 번뿐이다
1456년, 한양. 가을.
그가 왔다.
시습은 그가 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챘다. 사람은 냄새가 있다. 두려움의 냄새, 욕심의 냄새, 권력의 냄새. 각각 다르다. 그 사람에게서는 세 가지가 섞인 냄새가 났다. 가장 복잡한 냄새였다.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단정했다. 깨끗했다. 걸음이 반듯했다. 눈이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움이 무기인지 두려움인지 — 시습은 처음 보는 순간 알았다.
두려움이다. 저 눈은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이다. 날카로운 눈과 두려운 눈은 비슷하게 생겼다. 그러나 다르다. 날카로운 눈은 앞을 본다. 두려운 눈은 옆을 본다. 저 눈은 나를 보면서 — 내 옆을 보고 있다.
남자가 시습 앞에 섰다.
시습은 저잣거리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한복이 낡았다. 발이 맨발이었다. 보기에 영락없는 광인이었다.
남자가 시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김시습이냐?"
이름을 안다. 이름을 알고 왔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 오래 지켜봤다는 것이다. 오래 지켜봤다는 것은 — 두려웠다는 것이다. 두렵지 않으면 오래 지켜보지 않는다.
시습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내 알기로 네가 김시습이렷다. 어릴 때 세종 대왕 앞에서 시를 지은 신동. 성균관에서 가장 글을 잘 썼다는 사람."
맞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금 없다. 그 사람은 1년 전 충청도 어느 길 위에서 책과 함께 탔다.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나는 그 재 위에 서있는 다른 사람이다.
시습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를 보았다.
이름을 알아야겠다.
"누구십니까."
남자가 잠깐 멈췄다. 광인이 이름을 묻는 것이 예상 밖이었던 것 같았다.
"한명회다."
한명회.
그 이름이 공중에 떠있었다.
시습은 그 이름을 들었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한명회. 알고 있다.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계유정난을 설계한 사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한 사람. 김종서를 죽인 사람. 사육신이 죽은 것도 이 사람과 관계없지 않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
그 사람이 왔다. 광인을 찾아왔다. 왜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두렵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저잣거리 광인을 찾아왔다는 것이 — 그 자체가 말하는 것이 있다.
시습은 한명회를 보았다.
오래 보았다.
이 사람의 눈을 보겠다. 눈에는 말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있다. 말은 고를 수 있지만 눈은 고를 수 없다.
한명회의 눈이었다.
날카롭고 빠른 눈이었다. 많은 것을 계산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 그 계산 뒤에 있는 것이 보였다.
두려움이다. 저 눈 깊은 곳에 두려움이 있다. 날카로움이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 날카로운 칼이 두려운 것을 숨기듯이. 저 사람은 두렵다. 무엇이 두려운가. 알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나를 알 수 없어서 두려운 것이다.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시습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주장이 아니었다.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였다.
한명회가 웃었다.
웃음이 입가에만 있었다. 눈에는 없었다. 입이 웃는 것을 배운 사람의 웃음이었다.
저 웃음을 알고 있다. 세종 임금의 눈이 슬펐던 것을 다섯 살에 알았다. 입만 웃으면 배운 것이다. 배운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한명회는 지금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쓰고 있다.
"미친 사람이라고 하기엔 눈이 너무 맑구나."
시습이 대답하지 않았다.
한명회가 앉았다. 시습 옆에. 저잣거리 모퉁이 돌 위에. 관복을 입은 채로. 관복이 돌바닥에 닿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앉았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척하는 것이었다. 개의치 않는 사람은 앉을 때 옷을 확인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지금 나에게 맞추려 하고 있다. 내 눈높이로 내려오려 하고 있다. 왜인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상대에게 맞춘다. 그러나 맞추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한명회는 나를 이해하러 온 것이 아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러 온 것이다.
"그대의 재주를 버리기엔 아깝다."
그 말이 나왔다.
시습은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재주. 내 재주. 한명회가 말하는 재주는 무엇인가. 글을 쓰는 것인가. 시를 짓는 것인가. 아니다. 한명회가 말하는 재주는 —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말로, 글로, 생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왔다. 두려운 것을 자기 손 안에 넣으려고 왔다.
"조정에 나오면 크게 쓰겠다."
조정.
그 말이 공중에 떠있었다. 시습은 그 말을 보았다.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무게가 있는 말은 눈에 보였다. 저 말은 무거웠다. 무거운 만큼 — 비어있었다.
조정에 나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 임금 아래서 벼슬을 한다는 것이다. 새 임금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가. 알고 있다. 사흘 동안 책을 태우며 알았다. 저잣거리에서 여섯 분의 시신을 옮기며 알았다.
그리고 —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그 중심에 있었다.
시습은 한명회를 보았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않고 보았다. 한명회도 시습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긴 것들이 오간 순간이었다.
이 사람은 사육신을 죽게 한 사람이다. 저잣거리에 시신이 내던져지게 한 사람이다. 내가 무릎을 꿇고 수습한 여섯 분의 시신. 그 시신들이 생기게 한 일에 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앉아있다. 재주가 아깝다고 한다. 크게 쓰겠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시습이 입을 열었다.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두 번째였다. 처음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처음과 다른 말이었다. 처음은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이번은 — 대답을 한 것이었다.
조정에 나오지 않겠다는 대답. 크게 쓰이지 않겠다는 대답.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겠다는 대답. 그리고 — 당신이 한 일을 잊지 않겠다는 대답.
한명회의 눈이 변했다.
변하는 것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감춰지지 않았다. 두려움이 더 선명해졌다. 날카로움 뒤에 있던 두려움이 — 날카로움을 뚫고 나왔다.
보인다. 저 눈에 두려움이 더 선명해졌다. 내가 미쳤다고 하면 안심해야 하는데 — 더 두려워졌다. 왜인가. 진짜 미친 사람과 미친 척하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 내 눈이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명회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것을 이 눈으로 말했다. 한명회는 그것을 읽었다. 미친 사람의 눈에서 모든 것을 읽혔다는 것이 — 가장 두려운 것이다.
한명회가 일어섰다.
옷을 털었다. 천천히 털었다. 서두르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서두르면 진 것처럼 보이니까. 그러나 서두르지 않으려는 것이 역설적으로 서두르는 것이었다.
걷기 시작했다.
반듯한 걸음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걸음이었다. 오래 훈련된 걸음이었다. 두려움을 걸음에서 감추는 법을 아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세 걸음쯤 갔을 때 멈췄다.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기회. 한명회가 말하는 기회. 조정에 들어가는 것. 벼슬을 하는 것. 크게 쓰이는 것. 그것이 기회인가.
한명회가 설계한 나라에서 한명회가 주는 기회. 사육신이 죽은 자리에서 자라는 기회. 단종이 폐위된 왕좌 아래서 빛나는 기회.
그것은 한명회의 기회다. 나의 기회가 아니다.
한명회가 걸었다.
멀어졌다. 반듯한 걸음이 멀어졌다. 관복이 멀어졌다. 날카롭고 두려운 눈이 멀어졌다.
시습은 그 뒷모습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저 뒷모습을 기억하겠다. 저 걸음을 기억하겠다.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을. 기회는 한 번만 드린다고 하면서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내가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 저 사람에게 할 말이 생길 것이다. 말이 아니라 글로 할 말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나 때가 올 것이다. 살아있으면 때가 온다.
한명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시습은 시선을 거두었다.
저잣거리가 조용했다.
사람들이 멀리서 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광인과 관복 입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에 오래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이 저잣거리였다.
시습은 앉아서 하늘을 보았다.
가을 하늘이었다. 높았다. 구름이 흘렀다. 새가 날았다. 무리지어 날았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날았다.
저 새들은 어디로 가는가. 따뜻한 곳으로 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따뜻한 곳으로 간다. 저 새들은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두려움을 없앤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양이 아니다.
그 생각이 왔다. 갑자기 온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오고 있었는데 — 지금 도착한 것이었다.
한양은 끝났다. 한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사육신을 묻었다. 광인이 됐다. 한명회의 기회를 거절했다. 한양에서 버릴 것은 다 버렸다. 이제 떠나야 한다.
어디로 가는가.
모른다. 그러나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 모르면서 가는 것이 가는 것이다.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몰라도 흐르는 것처럼.
시습은 일어섰다.
그날 밤이었다.
처마 밑에 누워 시습은 한명회를 생각했다.
그 눈을 생각했다. 두려움이 담긴 눈. 날카롭게 보이지만 실은 두려운 눈.
한명회는 왜 나를 두려워하는가.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있는 것이 — 저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 언젠가 저 사람에게 할 말이 생긴다고 했다. 글로 할 말이. 어떤 글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때가 오면 알게 될 것이다. 살아있으면 된다. 살아있으면 때가 온다.
이제 진짜 떠나야겠다.
그 생각이 완성됐다.
진짜로 완성됐다. 아까는 방향이었다. 지금은 결심이었다. 방향과 결심은 다르다. 방향은 가리키는 것이고 결심은 움직이는 것이다.
내일 아침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간다. 모르면서 간다. 모르면서 걷는 것이 걷는 것이다.
별이 흘렀다.
멀리서 강물 소리가 들렸다. 한강이었다. 노량진 어딘가에 여섯 분이 누워계셨다. 시습은 그쪽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살겠습니다. 그리고 — 언젠가 그분들의 이름이 다시 불릴 수 있도록 — 무언가를 하겠습니다.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모르면서 가겠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처마 끝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시습은 눈을 감았다.
한양에서 자는 마지막 밤이었다.
— 6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떠나기 전에 한 곳이 남아있었다. 어머니의 무덤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시습은 무덤 앞에 엎드려 오래 있었다. '어머니, 저는 이상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무덤 뒤에서 노파 하나가 물었다. '어디 가냐?' 시습이 대답했다. '모릅니다.' 노파가 말했다. '잘 갔다 오너라.'"
5화의 방문자는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명회>로 설정했습니다. 실제 김시습과 한명회의 직접 대면 기록은 없으나 — 후에 남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소설적 재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