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라
1453년, 한양. 가을.
스승 김반이 말했다.
조용한 방이었다. 창밖에 가을바람이 불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스승은 시습을 바라보다가 —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승이 멈췄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멈추는 것 같았다.
말이 너무 많으면 진심이 흐려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멈춤이었다.
“살아남아라”
그것이 전부였다.
시습은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살아남아라. 왜 그 말을 하시는가.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은 — 앞으로 살아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하셨다. 무슨 일이란 무엇인가.
열아홉 살이었다.
질문이 많은 나이였다. 그러나 스승의 눈을 보자 —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스승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말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눈이었다.
그 눈이 말하는 것을 시습은 들을 수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스승은 지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듣지 않은 것처럼 들어야 한다.
“네.”
그것이 시습의 대답이었다.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다시 흔들렸다. 가을바람이 다시 불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이 오래 남았다.
그날 밤이었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바람 소리인가 했다.
그러나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소리였다.
사람이 달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 칼 소리였다.
시습은 이불 속에 누워 그 소리를 들었다.
저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스승이 말씀하신 무슨 일인가. 살아남아라, 하셨다.
나는 지금 이불 속에 있다. 이불 속에 있는 것이 살아남는 것인가.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시습은 이불을 더 꽉 쥐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 있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세종 임금께 지어드린 시가 있다.
시습은 입안으로 읊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봄은 가되 꽃은 지지 않으려 하고
바람은 불되 새는 날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머물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이미 떠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다섯 살에 지은 시였다.
그때는 봄꽃 이야기를 지었다. 지금은 안다. 그건 봄꽃 이야기가 아니었다.
머물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이미 떠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밖에서 다시 칼 소리가 났다.
시습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가 지금 떠나고 있다. 밖에서. 그리고 — 내 안에서도.
아침이 됐다.
소리가 사라졌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어제의 조용함과 달랐다.
어제는 아무 일도 없는 조용함이었다. 오늘은 — 무언가 끝난 다음의 조용함이었다.
시습은 일어났다.
밖으로 나갔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그대로였다. 파랬다. 구름이 흘렀다. 새가 날았다.
하늘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아래는 달라졌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이 움직였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아끼던 선배들의 이름이 들렸다.
있었다가 없어진 이름들이었다. 어젯밤 칼 소리의 이유가 그 이름들 속에 있었다.
시습은 그 이름들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이 없어지면 사람도 없어지는가. 아니다.
이름이 없어도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있었다. 살았고, 웃었고, 글을 썼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은 사라져도 —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아남아라.’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에서 촛불이 흔들리던 그 순간의 목소리가.
시습은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발이 움직였다.
모르면서 걷는 것이 걷는 것이다. 세종 임금이 가르쳐 주셨다.
스승도 가르쳐 주셨다. 다른 말이었지만 — 같은 말이었다.
1455년, 충청도. 여름.
길이 있었다.
과거 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스물한 살의 시습은 그 길 위에서 걸었다.
여름 햇살이 뜨거웠다. 땀이 흘렀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스승은 살아남으라고 하셨다. 나는 살아남고 있다. 걷고 있고, 밥을 먹고 있고,
숨을 쉬고 있다. 이것이 살아남는 것인가. 이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 몸이 먼저 알았다.
소식이 들렸다. 길 위에서 들렸다. 지나가는 사람의 입에서 들렸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단종께서 폐위되셨다.
시습은 멈췄다.
멈췄다. 발이 멈췄다. 숨이 멈췄다. 생각이 멈췄다. 세상이 멈췄다.
오래 그 자리에 서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피해서 걸었다. 한여름 땡볕에 길 한복판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
그러나 시습은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임금. 나는 한 번도 그 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았다.
그 눈이 세종 임금의 눈을 닮았을 것이라는 것을. 슬프면서 단단한 눈. 슬픔을 안고도 걸어온 사람의 눈.
그 눈이 —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흘이 흘렀다.
시습은 사흘을 먹지 않았다. 자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길가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해가 뜨고 졌다. 다시 뜨고 다시 졌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시습은 가지고 온 책들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세종 임금께서 가르쳐 주신 글자들이다. 임금께서 물려주신 생각들이다.
임금께서 남기신 흔적들이다.
그런데 지금 — 임금의 손자가 폐위됐다.
임금이 그토록 사랑했던 나라가 — 임금이 그토록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 — 이렇게 됐다.
이 책들을 들고 과거를 보러 간다는 것이 —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 옳은가.
옳지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나오는 답이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답이었다.
시습은 책들을 쌓았다. 불을 붙였다.
책이 탔다. 종이가 말리며 검어졌다. 열두 살부터 읽어온 글자들이 사라졌다.
세종 임금이 직접 골라주신 책들이었다. 임금께서 가르쳐 주신 글자로 쓰인 책들이었다.
용서하십시오.
임금이시여, 스승이시여 — 용서하십시오.
살기 위해서입니다.
재가 되었다. 공중으로 흩어졌다.
시습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양 성문 앞이었다.
시습은 그 앞에 서서 스승의 말을 생각했다.
'살아남아라'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불 속에 누워 칼 소리를 듣는 것인가. 책을 들고 과거를 보러 가는 것인가.
아니면 —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방법으로 — 미치는 것인가.
미침이 살아남는 방법인가. 이것이 스승이 말씀하신 살아남는 것인가.
스승은 어떤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살아남으라고 하셨다. 방법은 — 시습이 찾아야 했다.
나는 방법을 찾았다.
스승이시여 — 이것이 맞는 방법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찾은 방법입니다.
미침으로써 살겠습니다. 살아서 — 무언가를 남기겠습니다.
시습은 머리를 풀었다. 상투가 풀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그리고 걸었다. 성문 안으로.
그날 밤.
시습은 저잣거리 처마 밑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별이 있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밤에도 별이 있었을 것이다. 단종이 폐위되던 날 밤에도.
책이 타던 그 밤에도.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살아남으라고 하셨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 이것이 살아남은 것인가.
그 질문에 답이 없었다.
답이 없다는 것이 —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있는 것만이 아직 답을 모른다. 죽은 것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묻는다는 것은 —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다.
모르면서도 살아있다. 답이 없어도 살아있다. 그것으로 — 지금은 충분하다.
다섯 살의 밤이 떠올랐다. 세종 임금이 말씀하셨다 — 앞으로 가끔 부르겠다.
그리고 스승이 말씀하셨다 — 살아남아라.
두 분이 원하신 것이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살아있어라. 걸어가라. 모르면서도 걸어가라.
알겠습니다.
살겠습니다.
별이 흘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시습은 눈을 감았다.
광인의 두 번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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