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위해
"그날 밤을 시습은 기억했다. 1453년 가을. 스승 김반이 촛불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라.' 그날 밤 멀리서 칼 소리가 들렸다. 시습은 이불 속에서 세종의 시를 읊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비겁함인가, 전략인가 — 광인의 첫 번째 밤이 지나고, 그 답이 떠올랐다."
"살아남으라고 하셨다. 스승의 그 말이 계유정난의 밤을 버티게 했다. 그리고 — 단종 폐위의 소식을 들었다.
세종이 불렀다.
시습은 갔다. 임금은 시를 물었고, 시습은 시를 지었다. 임금은 글을 가르쳤고, 시습은 배웠다.
그것이 반복됐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강이 흐르는 것처럼, 그 반복은 자연스러웠다.
좋은 것은 반복되어도 좋다. 해가 매일 뜨는 것이 지겹지 않듯이.
세종이 죽었다.
시습은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울어야 할 때 우는 것은 — 느끼는 것을 배신하지 않는 것이니까. 임금은 가르쳐 주셨다. 모르면서 걸을 수 있다고. 끝이 없으면 계속 걸을 수 있다고. 그 가르침을 품에 넣고 시습은 다시 걸었다.
문종이 왔다. 문종이 갔다.
단종이 왔다.
열두 살짜리 임금이 왔다. 시습은 그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눈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세종 임금의 눈을 닮았을 것이다. 슬프면서 단단한 눈. 슬픔을 안고도 걸어온 사람의 눈.
수양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의 말이 달라졌다. 달라짐이 두려움의 냄새를 풍겼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강이 낭떠러지를 향해 흘러도 멈추지 않는 것처럼 — 이 나라도 지금 어딘가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멈출 수 없는 방향으로.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그날 밤 한양에서 칼 소리가 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끼던 선배들의 이름이 사라졌다.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살아있다. 그들은 사라졌다. 살아있는 것이 옳은가.
그 질문에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채로 시습은 걸었다. 과거 공부를 계속했다.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시습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 충청도 어느 길 위에서 알았다.
단종이 폐위됐다.
소식을 들은 것은 충청도 어느 길 위에서였다. 과거 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시습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발만이 아니었다. 숨도 멈췄다. 생각도 멈췄다.
세상이 멈췄다.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임금. 나는 한 번도 그 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알았다. 그 눈이 어떨지.
세종 임금의 눈을 닮은 눈. 슬프면서 단단한 눈. 그 눈이 —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흘을 그 자리에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 잠을 자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사흘째 밤에 시습은 일어났다.
가지고 온 책들을 쌓았다. 불을 붙였다.
'용서하십시오. 살기 위해서입니다.'
책이 탔다. 미래가 탔다. 과거 공부를 하던 청년이 탔다. 재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한양으로 향했다.
1455년, 한양. 여름.
시습은 걷고 있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발아래 흙이 뜨거웠다. 한여름 땡볕이었다. 그러나 그는 뜨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뜨거움을 느끼기에는 안에서 타오르는 것이 더 컸기 때문이다.
사흘 전에 책을 태웠다.
사흘 동안 걸었다.
걸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생각은 발보다 먼저 달렸고, 발보다 늦게 쉬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한양으로 간다.
한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모른다.
모르면서 가는가.
간다. 모르면서도 간다. 강은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면서도 흐른다. 나도 흐른다.
길 위에 돌멩이 하나가 있었다. 시습은 그것을 발로 찼다. 돌멩이가 굴러갔다. 멀리까지 굴러갔다가 멈췄다.
저 돌멩이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내가 찼기 때문에 갔는가. 아니면 갈 곳이 있어서 간 것인가.
돌멩이에게는 의지가 없다. 그러므로 돌멩이는 자유롭다. 의지가 있는 것들만 부자유스럽다.
나는 의지가 있는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부자유스럽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한양의 성문이 보였다. 성벽이 보였다. 성벽 너머로 기와지붕들이 보였다.
그 기와지붕들 아래 새 임금이 있었다. 수양대군. 이제는 임금(세조)이라 불리는 사람.
시습은 성문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야 하는가.
들어가야 한다.
왜 들어가야 하는가.
모른다. 그러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그것만이 문제였다.
시습은 성문 앞 나무 그늘에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상인이 지나갔다. 농부가 지나갔다. 선비가 지나갔다. 포졸이 지나갔다.
모두 성문을 통과했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그러나 시습은 알았다.
눈에 보이는 성문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문이 있다는 것을. 재주 있는 선비를 찾아다니는 눈들이 있다는 것을. 세조 측에서 그를 찾고 있다는 것을. 한번 손에 잡히면 — 조정에 나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을.
나는 조정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죽어야 하는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시습은 오래 앉아 있었다. 땅을 보았다. 하늘을 보았다. 다시 땅을 보았다.
그때 한 사람이 지나갔다.
거지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찢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비틀비틀 걸으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피했다. 포졸이 다가오다가 한 번 보더니 그냥 지나쳤다.
시습은 그것을 보았다.
미친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미친 사람의 말은 기록하지 않는다.
미친 사람은 — 자유롭다.
그는 오래 그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앞면을 보고, 뒷면을 보고, 옆면을 보았다.
그것이 답인가.
그것이 답이다.
미친다는 것은 지는 것인가.
아니다. 미친다는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도망이 아니다. 방패다. 방패는 비겁함이 아니다. 방패는 전략이다.
그러나 — 진짜로 미쳐야 하는가, 미친 척만 해야 하는가.
시습은 웃었다. 소리 없이 웃었다.
그 경계를 누가 알 것인가. 나 자신도 모르게 되면 — 그것이 완벽한 광인이다.
그는 일어섰다.
먼저 머리를 풀었다.
상투를 감고 있던 끈을 풀었다.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조선의 선비에게 상투는 정체성이었다.
상투 없는 선비는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방금 선비를 버렸다.
옷을 보았다.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그는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찢어졌다. 길가의 흙을 옷에 문질렀다.
먼지가 앉았다. 이제 누가 봐도 선비가 아니었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지 않다. 목소리가 남았다.
시습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컸다.
성문 앞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시습은 또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말이 섞였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포졸이 다가오려다 멈췄다.
동료 포졸이 말했다.
"미친 놈이야. 냅둬.“
시습은 그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성공이다.
한양 도성 안이었다.
시습은 걸었다. 비틀거리며 걸었다. 비틀거림은 처음엔 연기였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 진짜로 비틀거리게 되었다. 사흘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흘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연기가 현실이 되고 있다.
그것이 두려운가.
아니다. 오히려 — 편하다.
사람들이 그를 피했다. 장터에서 피했다. 골목에서 피했다. 선비들이 피했다. 상인들이 피했다.
어린아이들만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들의 눈은 달랐다.
두렵지 않은 눈이었다. 판단하지 않는 눈이었다. 그냥 보는 눈이었다.
아이들은 미친 사람과 멀쩡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으로 본다. 그것이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침과 멀쩡함의 경계를 긋는 것은 — 어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니까.
시습은 걸으면서 도성을 보았다.
달라진 것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달라짐이었다. 공기가 달랐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랐다.
다들 조심스러웠다. 다들 작아져 있었다.
새 임금이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이미 —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걷고 있었다.
이것이 공포다.
공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기처럼 있다. 물처럼 흐른다. 사람들은 공포가 있는 줄도 모르면서 공포 속에서 산다. 물고기가 물을 모르는 것처럼.
나는 저 공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저 공포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 공포 밖에 있을 수 있다. 미친 사람에게 공포는 통하지 않으니까.
그는 걷다가 멈췄다.
저잣거리 한복판이었다.
사람들이 오갔다. 물건을 팔고 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앉았다.
사람들이 피해서 걸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보인다.
멀쩡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미친 사람의 눈에는 보인다. 저 상인은 무서워하고 있다.
저 선비는 숨기고 있다. 저 부인은 슬퍼하고 있다. 저 노인은 체념하고 있다.
사람들은 멀쩡해 보이지만 — 안은 다 무너져 있다. 나는 밖이 무너져 있지만 — 안은 아직 서 있다.
어느 쪽이 더 미친 것인가.
해가 기울었다.
시습은 저잣거리 모퉁이에 기대어 앉았다. 배가 고팠다. 진짜로 고팠다. 사흘을 굶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지나가던 노파 하나가 멈췄다.
노파는 시습을 보았다. 한동안 보더니 — 품에서 밥 덩어리 하나를 꺼냈다. 말없이 시습 앞에 놓았다.
그리고 갔다.
시습은 그 밥 덩어리를 보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밥이다.
왜 주었는가.
모른다. 노파도 모를 것이다. 그냥 주었을 것이다. 이유 없이 주는 것이 — 가장 순수한 줌이다.
세상을 버렸는데, 세상이 밥을 준다.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밥을 먹었다. 천천히 먹었다.
달이 떴다.
저잣거리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불빛들이 하나씩 켜졌다. 어디선가 아이 재우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시습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오늘 미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 오늘 처음으로 온전하다는 느낌이 든다.
미침 속에서 온전함을 느끼는 것은 — 역설인가.
역설이 아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미친 것이지, 나의 기준으로는 멀쩡한 것이다. 세상이 나를 미쳤다고 하는 것은 — 세상이 나와 다르다는 뜻이다.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왜 미침인가. 다름이 미침이라면 — 이 세상이 먼저 미쳤다.
달이 높이 떴다.
시습은 하늘을 보았다.
달은 언제나 저 자리에 있었다. 세종이 살았을 때도, 단종이 폐위됐을 때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도 — 달은 저 자리에 있었다.
달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달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달은 그냥 빛난다.
나도 그럴 수 있는가. 이유 없이, 판단 없이, 그냥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광인의 자유다.
밤이 깊었다.
시습은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다. 거적 하나 없었다. 맨땅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세종 임금. 보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선비를 버렸습니다. 이름을 버렸습니다. 체면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버리지 않았습니다.
임금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다섯 살에 배운 것을. 공부가 끝나는 날은 없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오늘부터 미칩니다.
그러나 미침으로써 살겠습니다.
살아서 — 무언가를 남기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모르면서 걷겠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처마 끝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시습은 잠이 들었다.
광인의 첫 번째 밤이었다.
아침이 됐다.
새소리가 들렸다. 시습은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푸른 하늘이었다. 구름이 흘러갔다.
그는 일어났다.
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 가벼웠다.
어제 나는 무거운 것들을 많이 버렸다.
체면을 버렸다. 이름을 버렸다. 미래를 버렸다.
버릴수록 가벼워진다.
그것이 자유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와 비슷한 무언가라는 것은 안다.
그는 걷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러나 발이 움직였다.
발이 아는 것이 머리가 모르는 것보다 더 많은 경우가 있었다.
간다.
모르면서 간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저잣거리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상인들이 물건을 펼쳤다.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세상은 어제와 같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시습의 눈에는 달랐다.
광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 선비의 눈으로 보던 세상과 달랐다. 더 많이 보였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감추려는 것들이 더 잘 보였다. 숨기려는 것들이 더 잘 드러났다.
미침이 눈을 뜨게 한다.
아이러니다.
그러나 세상의 진실은 대부분 아이러니 속에 있다.
시습은 걸으면서 작게 웃었다.
처음으로 — 진짜로 — 웃었다.
— 3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 "그날 밤을 시습은 기억했다. 1453년 가을. 스승 김반이 촛불 앞에서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라.' 그날 밤 멀리서 칼 소리가 들렸다. 시습은 이불 속에서 세종의 시를 읊었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비겁함인가, 전략인가 — 광인의 첫 번째 밤이 지나고, 그 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