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신동 (神童)

임금의 눈이 슬펐습니다

by 카미노

1438년, 한양. 봄.


시습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긁었다. 천(天). 지(地). 인(人).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글자를 쓰고 나서 그는 멈췄다.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글자 너머를 보는 것처럼, 오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왜 하늘인가. 땅은 왜 땅인가. 사람은 왜 사람인가.


다섯 살짜리가 하기에 너무 큰 질문이었다. 그러나 시습은 질문이 크다는 것을 몰랐다. 그에게 질문은 그냥 질문이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하듯이 — 궁금하면 궁금한 것이었다.


손끝에 흙이 묻었다. 그는 흙을 보았다.


흙은 차갑다. 그러나 씨앗을 품으면 따뜻해진다. 사람도 그런가. 무언가를 품으면 따뜻해지는가.


대문이 열렸다.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 갓을 쓰고 청포를 입은 선비였다. 시습은 고개를 들었다. 한 번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관복이 아니었다. 손에 먹물이 없었다. 그러나 눈에 글자가 많이 쌓인 사람이었다.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의 눈은 달랐다. 시습은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 느낄 수는 있었다.


선비가 가까이 왔다. 그리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른이 무릎을 꿇었다.


시습은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눈을 맞추려면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지 않는 어른은 아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 위를 보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내려왔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진짜로 보려는 사람이다.


"이름이 시습이냐?“


"네.“


"나는 이계전이라 한다. 성균관에서 일한다.“


성균관. 공부하는 곳. 선생님들이 있는 곳. 선생님들도 공부를 하는가.


"선생님들도 거기서 공부해요?“


선비가 잠깐 멈췄다. 시습은 그 멈춤을 느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선생님들도 공부한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야.“


죽을 때까지.


시습은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씹어보고, 뒤집어보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렇다면 공부가 끝나는 날은 없다. 공부가 끝나는 날이 없다면 사람은 영원히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다. 영원히 모르면서도 살 수 있는가. 살 수 있다. 꽃은 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핀다. 강은 강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도 흐른다. 그렇다면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모르면서 걷는 것이 걷는 것인가.


"그럼 공부가 끝나는 날은 없겠네요.“


선비가 웃음을 참는 것을 시습은 알아챘다. 참는 웃음은 참지 않는 웃음보다 더 따뜻하다는 것도 알아챘다.

"없다.“


시습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흙바닥으로 눈을 내렸다.

없다. 그것이 답이다. 없다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끝이 없으면 두렵지 않은가. 끝이 없으면 오히려 두렵지 않다. 끝이 있으면 그 끝에서 멈춰야 하니까. 끝이 없으면 계속 걸을 수 있으니까.




그날 밤 이계전은 집에 돌아와 일기를 꺼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는 오래 생각하다가 붓을 들었다.


아이를 보았다. 다섯 살이라 하나 눈이 달랐다. 무섭도록 고요한 눈이었다. 저 아이가 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나라가 저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붓을 내려놓았다.


쓰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으나 쓰지 않았다. 너무 이른 말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다섯 살이었다.





경복궁 사정전. 늦봄.


시습은 처음 궁궐에 왔다.


걸으면서 마루를 느꼈다.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단단하고 묵직한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였다. 이 마루를 밟고 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 마루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루는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무엇을 기억하는가. 왕의 발소리를. 신하의 발소리를. 기쁜 발소리와 두려운 발소리를. 발소리는 다 다른가. 다르다. 기쁜 사람의 발소리는 가볍고 두려운 사람의 발소리는 무겁다. 나의 발소리는 지금 어떠한가.


시습은 자신의 발소리를 들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냥 발소리였다. 두렵지 않다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두려워야 하는가. 임금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일인가. 두려운 것은 모르는 것이다. 아직 임금을 보지 못했으니 두려울 수가 없다.


문이 열렸다.


넓은 방이었다. 조용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습은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있었다.


‘저분이다.’


시습은 임금을 보았다. 한 번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눈이 슬프다.’


다른 것은 나중에 보아도 됐다. 눈이 먼저였다. 사람을 볼 때는 눈을 먼저 보아야 한다. 눈에는 말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 있으니까. 말은 고를 수 있지만 눈은 고를 수 없으니까.


임금의 눈은 슬펐다.


슬프면서 단단했다. 슬픔을 오래 안고 다닌 사람의 눈이었다. 슬픔이 무거워서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 슬픔을 안고도 걸어온 사람의 눈이었다. 그것이 달랐다.


저분은 무엇이 슬픈가. 임금이 슬플 수 있는가. 임금은 모든 것을 가졌는데 슬플 수 있는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슬플 수 있다. 아니,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슬픈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을 것도 많으니까.


절을 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김시습이라 하옵니다.“


"나이는?“


"다섯이옵니다.“


임금이 잠시 이계전을 보았다. 이계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이 다시 시습을 보았다.


"글을 안다 들었다.“


"조금 압니다.“


"시를 짓는다 들었다.“


"잘 짓지는 못합니다.“


임금이 무언가를 참는 것을 시습은 느꼈다. 이계전이 웃음을 참던 것과 비슷했지만 — 달랐다. 이계전의 것은 따뜻한 참음이었고, 임금의 것은 오래된 참음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것을 참아온 사람의 참음이었다.


"봄이 가려 한다. 그것으로 한 수 지어보아라.“


붓이 왔다. 벼루가 왔다. 종이가 왔다.


시습은 붓을 집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냥 있었다. 창밖을 보았다. 꽃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날렸다. 새 한 마리가 날다가 멈췄다가 다시 날았다.


봄이 간다. 봄이 가는데 꽃은 가지 않으려 한다.

바람이 부는데 새는 날지 않으려 한다. 왜 가지 않으려 하는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머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머물지 못한다. 머물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가. 그렇다. 영원히 머무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지는 꽃이 피는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 지기 때문이다.


붓이 움직였다.





봄은 가되 꽃은 지지 않으려 하고

바람은 불되 새는 날지 않으려 한다

사람이 머물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이미 떠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시습은 붓을 내려놓고 임금을 보았다.


임금이 시를 읽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머물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이미 떠나기 시작한 것들이다.“


그 문장이 방 안에 잠시 떠 있었다.


임금이 시습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임금의 눈에 무언가가 생겼다.


시습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슬픔보다 깊고 기쁨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사람이 오랫동안 혼자 들고 있던 것을 — 누군가도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오는 것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이 뜻을 아느냐?“


아이가 잠깐 생각했다.


아는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나는 느꼈다. 느낀 것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몸으로 아는 것이 머리로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아는 것이니까.


"봄꽃이 예쁜 것은 질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지 않는 꽃은 예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임금이 한동안 시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가끔 부르겠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아라.“





궁을 나오면서 시습은 생각했다.


임금은 슬프다. 임금은 모든 것을 가졌는데 슬프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갖는다고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슬픔은 가진 것과 관계없는 것인가. 관계없다. 슬픔은 안에서 오는 것이니까. 안에서 오는 것은 밖에서 채울 수 없는 것 이니까.


담 아래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시습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계전이 옆에서 기다렸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손가락으로 민들레를 살짝 건드렸다. 꽃이 흔들렸다.


"임금님 눈이 슬펐어요.“


이계전이 굳는 것을 시습은 느꼈다.


"임금님 눈이?“


"네. 웃으셨는데 눈은 웃지 않으셨어요.“


사람이 웃을 때 눈도 웃으면 진짜 웃음이다. 입만 웃으면 — 입이 웃는 것을 배운 것이다. 배운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임금은 웃음을 배웠다. 임금이기 때문에 배워야 했을 것이다. 임금은 슬플 때도 웃어야 하니까.

이계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습은 민들레를 보았다. 민들레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피었다. 누가 웃으라고 하지 않아도 노랬다. 바람이 불면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가. 아니면 배웠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가. 임금은 배웠을 것이다. 오래, 많이, 깊이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 눈만 슬픈 것이다.


일어섰다.


집을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시습은 생각했다.


임금님도 힘드시겠다.





그날 밤 시습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습은 천장에 대고 생각했다.

나는 오늘 임금을 보았다. 임금은 슬펐다. 나는 시를 지었다. 임금이 그 시를 읽었다. 임금의 눈에 무언가가 생겼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좋은 것이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었다.


앞으로 가끔 부르겠다고 하셨다.


가끔은 얼마인가. 가끔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정해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살다 보면 온다. 오면 간다. 간다는 것은 슬픈 것인가.


봄꽃이 예쁜 것은 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임금님이 나를 부르는 것도 — 언젠가 그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인가.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끝이 없으면 계속 걸을 수 있다고 낮에 생각했다. 모르면서도 걸을 수 있다. 모르면서 걷는 것이 걷는 것이다.


시습은 눈을 감았다.


봄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꽃잎 하나가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내일도 봄이다. 그러나 오늘의 봄은 오늘뿐이다.


잠이 들었다.





이계전은 그날 밤 일기를 다시 꺼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는 낮에 쓰다 만 문장 아래에 붓을 댔다.


아이가 말했다. 임금의 눈이 슬펐다고. 웃으셨는데 눈은 웃지 않으셨다고. 나는 십 년을 곁에서 모시면서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말을 — 다섯 살짜리가 궁을 나오면서 민들레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아이는 시를 지었다. 머물고 싶은 것들은 모두 이미 떠나기 시작한 것들이라고.

나는 오늘 두 번 말을 잃었다.


첫 번째는 아이의 눈을 보았을 때. 두 번째는 아이의 시를 들었을 때.


붓을 내려놓았다.


창밖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오늘 핀 꽃이 내일이면 질 것이었다.

이계전은 생각했다.


'저 아이가 자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 이 아이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인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 위에서 춤을 췄다.


빗소리가 깊어졌다.


— 2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광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려워서였다면 도망쳤을 것이다. 그는 머물기 위해 미쳤다. 미친 사람에게는 손대지 않으니까."


"작중의 시는 시는 소설적 창작입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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