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1456년, 한양 동쪽 길. 가을에서 겨울로.
걸으면서 시습은 이름을 생각했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태어날 때 받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 내가 고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고르지 않은 것이 나를 부른다. 내가 고르지 않은 것에 내가 반응한다. 반응하다 보면 — 그것이 나인 것처럼 된다.
그것이 나인가. 아니면 나인 것처럼 된 것인가.
김시습.
그 이름이 있었다. 다섯 살에 세종 임금 앞에서 시를 지은 아이의 이름. 성균관에서 가장 글을 잘 쓴 청년의 이름. 장원급제가 예약된 선비의 이름. 그 이름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가.
있다. 그러나 달라졌다. 이름은 같은데 이름 안에 든 것이 달라졌다. 그릇은 같은데 내용물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그릇이 나인가, 내용물이 나인가. 그릇이 나라면 — 이름이 나다. 내용물이 나라면 — 이름은 나를 담는 것이다. 나를 담는 것이 나는 아니다.
길이 이어졌다.
발이 땅을 밟았다. 땅이 발을 받아주었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떨어졌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나무가 버리는 것인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인가. 나무는 잎을 버리는가, 잎이 나무를 떠나는가.
모른다. 그러나 떨어진 잎은 땅이 된다. 땅이 된 잎은 다시 나무를 키운다. 버린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버린다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동봉이라는 이름을 처음 썼다.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였다. 주막 주인이 물었다 — 이름이 무엇이오. 시습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동봉이라 합니다."
동봉(東峰). 동쪽 봉우리. 지금 동쪽으로 걷고 있으니 동봉이었다. 이유가 그것뿐이었다.
주막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봉이라 불렀다. 시습은 그 이름에 반응했다. 동봉이라 불렸는데 돌아보았다. 돌아보았다는 것이 — 그 이름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날 밤 시습은 생각했다.
나는 방금 동봉이 됐는가. 주막 주인이 동봉이라 불렀고 내가 돌아보았으니 — 나는 동봉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까까지 김시습이었는데 지금은 동봉인가. 김시습이 사라졌는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있다. 동봉이라 불렸을 때 돌아본 것은 — 이 몸이 돌아본 것이다. 이 몸 안에 김시습이 있다. 이름이 바뀌어도 몸은 바뀌지 않았다. 몸이 나인가.
몸이 나라면 — 몸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가. 그렇다면 나는 몸이 사는 동안만 있는 것인가. 몸이 죽으면 나도 없는 것인가.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채로 잠이 들었다.
며칠 뒤였다.
산길을 걷다가 나무꾼을 만났다. 나무꾼이 물었다 — 어디서 왔소. 시습이 대답했다. 한양에서 왔소. 나무꾼이 다시 물었다 — 이름이 무엇이오.
이번엔 다른 이름을 댔다.
"벽산이라 합니다."
벽산(碧山). 푸른 산. 지금 산 속에 있으니 벽산이었다. 이유가 또 그것뿐이었다.
나무꾼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산이라 불렀다. 시습은 또 반응했다. 또 돌아보았다.
또 반응했다. 벽산이라 불렸는데 또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벽산인가. 동봉이기도 하고 벽산이기도 한가. 두 이름이 나인가. 두 이름 중 어느 것이 더 나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동봉도 나고 벽산도 나지만 — 어느 것이 더 나인 것은 없다. 두 이름이 다 나라면 — 두 이름 중 어느 것도 진짜 나가 아닌 것이다. 이름은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 이름이 나를 가리키면 나를 봐야지 이름을 보면 안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 있는가.
나무꾼이 밥을 나눠주었다. 시습은 먹었다. 먹으면서 생각했다.
밥을 먹는 것이 나다. 배가 고픈 것이 나다. 먹으면 배가 차는 것이 나다. 이것이 나라면 — 이름이 무엇이든 같다. 동봉이 밥을 먹어도 배가 차고 벽산이 밥을 먹어도 배가 찬다. 배가 차는 것은 이름과 관계없다. 배가 차는 것이 더 나인 것이다. 이름보다 배고픔이 더 나인 것이다.
나무꾼이 떠났다.
시습은 오래 앉아 있었다.
이름보다 배고픔이 더 나인 것이다. 이름보다 몸이 더 나인 것이다. 몸보다 — 느끼는 것이 더 나인 것이다. 느끼는 것보다 —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인 것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인 것이 있는가.
있다.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있다. 지금 나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생각을 보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 나라면 — 생각을 보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이 가장 나인 것인가.
설잠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었다.
어느 절에서 하룻밤 묵게 됐다. 주지 스님이 물었다 — 법명이 있소. 시습이 말했다.
"설잠이라 합니다."
설잠(雪岑). 눈 덮인 봉우리. 왜 그 이름이 나왔는지 몰랐다. 그냥 나왔다. 준비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동봉이라 불렸을 때와 달랐다. 벽산이라 불렸을 때와도 달랐다. 설잠이라 부르는 것이 — 덜 낯설었다. 다른 이름들보다 조금 더 자신과 가까운 느낌이었다.
왜인가.
설잠. 눈 덮인 봉우리. 눈이 쌓이면 봉우리가 조용해진다. 아래는 요란해도 봉우리는 조용하다. 눈 아래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눈이 녹으면 나온다. 눈 덮인 봉우리처럼 — 조용하지만 있는 것.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다른 이름들은 밖에서 붙인 것이었다. 동쪽으로 가니 동봉. 산에 있으니 벽산. 상황이 이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설잠은 — 안에서 나왔다. 안에서 나온 이름이 밖에서 붙은 이름보다 더 나인 것이다.
주지 스님이 설잠이라 불렀다.
시습은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단순히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뭔가가 조금 더 움직였다.
가슴 안에서 조금 더 움직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름이 맞을 때 생기는 것인가. 이름이 맞는다는 것이 있는가.
이름이 나를 정확히 가리킬 때 — 이런 느낌이 오는가.
잠을 자기 전에 생각했다.
설잠. 나는 설잠인가. 설잠이 나인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써본 이름 중에 가장 가깝다. 가장 가까운 이름이라도 — 이름은 이름이다. 나를 완전히 담을 수 없다. 어떤 그릇도 강물을 완전히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며칠이 더 지났다.
시습은 걸으면서 이름들을 생각했다. 김시습. 동봉. 벽산. 설잠. 네 개의 이름이 있었다. 네 개의 이름 중 어느 것도 완전한 나가 아니었다. 네 개를 합쳐도 완전한 나가 아닌 것 같았다.
이름이 나를 담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름 밖에 있는 것인가. 이름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인가.
어느 강가에 앉았다.
강물을 보았다. 강물이 흘렀다. 강물에 이름이 있는가. 저 강은 한강인가, 금강인가, 낙동강인가. 이름이 있다. 그러나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강물 자신은 이름을 모른다. 이름 없이 흐른다. 이름 없이 흘러도 — 강은 강이다.
강은 이름 없이도 흐른다. 나는 이름 없이도 나인가.
돌을 하나 집었다. 강물에 던졌다.
물이 튀었다. 파문이 번졌다. 퍼지다가 사라졌다.
저 파문에 이름이 있는가. 없다. 이름이 없어도 파문은 있었다. 있다가 사라졌다. 사라졌으니 없는가. 아니다.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이 없어도 있었고 — 사라졌어도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런가. 이름이 없어도 나는 있는가. 이름이 사라져도 나는 있는가.
있다.
그 답이 왔다. 생각이 아니라 몸에서 왔다. 머리가 답한 것이 아니라 가슴이 답한 것이었다. 가슴이 답하는 것이 머리가 답하는 것보다 더 빠르다. 더 빠른 것이 더 진짜인 경우가 있었다.
있다. 이름 없어도 나는 있다. 이름을 버려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은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지 나 자신이 아니었다. 나를 가리키는 것을 버려도 — 가리켜지는 것은 남는다.
그렇다면 — 이름을 버린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그 말이 왔다.
조용히 왔다. 큰 깨달음처럼 오지 않았다. 그냥 왔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왔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도착하는 것처럼 왔다.
이름을 버린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오래 그 말을 들고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강가에 누웠다. 강물 소리가 들렸다. 낮고 일정한 소리였다. 멈추지 않는 소리였다. 어제도 이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내일도 있을 것이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있었다.
별에도 이름이 있다.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별 자신은 이름을 모른다. 이름 없이 빛난다. 수천 년 전에도 빛났고 지금도 빛나고 수천 년 후에도 빛날 것이다. 이름이 생기기 전에도 빛났고 이름이 사라진 후에도 빛날 것이다. 이름과 관계없이 빛나는 것이 있다.
나도 그런가. 이름과 관계없이 있는 것이 나인가.
김시습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김시습. 그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으로 임금 앞에서 시를 지었다. 그 이름으로 성균관에서 글을 읽었다. 그 이름으로 스승에게 배웠다. 그 이름으로 — 어머니의 무덤 앞에 엎드렸다.
그 이름이 없어지는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름에 묶이지 않겠다. 이름이 나를 정의하게 두지 않겠다. 내가 이름을 쓰는 것이지 이름이 나를 쓰게 두지 않겠다.
동봉을 생각했다. 벽산을 생각했다. 설잠을 생각했다.
세 이름도 마찬가지다. 내가 쓰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쓸 수 있다. 광인에게는 광인의 이름이 있어야 하고 승려에게는 승려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나는 아니다. 나는 그것들 뒤에 있다. 그것들이 사라져도 남아있는 것이 나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그 질문이 왔다.
답이 없었다. 오늘도 답이 없었다. 어제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어제는 답이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오늘은 답이 없다는 것이 — 불안하지 않았다.
왜인가.
답이 없다는 것이 — 아직 걷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답이 있으면 멈추게 된다. 답을 향해 가는 것이 걷는 것이다. 답이 없으면 계속 걸을 수 있다.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것이 — 계속 살아있다는 것이다.
강물이 흘렀다.
멈추지 않았다. 이름 없이 흘렀다. 강물은 자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냥 흘렀다. 흐르는 것이 강물의 답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겠다. 내가 무엇인지 묻겠다. 그러나 답을 기다리지 않겠다. 묻면서 걷겠다. 걸으면서 묻겠다. 걸음이 답이다. 걷는 것이 나다.
아침이 됐다.
시습은 일어났다.
강물을 보았다. 강물이 흘렀다. 어제와 같은 강물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물이 아니었다. 강은 같은데 물은 달랐다. 어제의 물은 흘러가고 오늘의 물이 왔다. 강은 언제나 같은 강이면서 언제나 다른 물이었다.
나도 그런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다른가. 같다. 이 몸이 같다. 다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알았다. 조금 더 알면 조금 다른 사람이다. 같으면서 다른 것이 나다. 강처럼.
이름들을 생각했다.
김시습. 동봉. 벽산. 설잠.
이 이름들이 다 나다. 그러나 나는 이 이름들보다 크다. 이름들이 나를 다 담지 못한다. 그것으로 괜찮다. 담기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 담기지 않는 것 안에 진짜가 있다.
걷기 시작했다.
오늘도 동쪽이었다. 금강산이 있는 쪽이었다. 이름 없이 걸었다. 아니 — 이름이 있지만 이름에 묶이지 않고 걸었다. 이름을 들고 걷는 것이 아니라 — 이름을 뒤에 두고 걷는 것이었다.
이름이 없는 나는 더 나인가, 덜 나인가.
그 질문이 아직 있었다.
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안다. 이름을 버려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을 찾으면서 걷겠다.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찾으면서 걷는 것이 목적이다. 걷는 것이 나다.
길이 이어졌다.
안개가 낮게 깔려있었다. 안개 속으로 길이 사라졌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길은 있다. 걸으면 된다.
시습이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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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다리 위에서 잠깐 멈췄다. 이유를 몰랐다. 발이 멈춘 것이었다. 강물을 오래 보았다. 그때 지나가는 아이 하나가 물었다. '아저씨, 거기서 뭐 해요?' 그 눈이 세종 임금의 눈과 비슷했다. 시습은 다리에서 내려왔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