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네 길이다
1457년, 금강산. 봄.
혜각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나이를 알 수 없었다. 일흔인지 여든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무게가 아니었다. 오래 살았다는 것이 — 오래 내려놓았다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금강산 어느 암자에 있었다.
암자는 작았다. 방이 하나였다.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 돌이 몇 개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꾸민 것이 없었다. 꾸미지 않은 것이 가장 오래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공간이었다.
시습이 들어서자 혜각이 눈을 떴다.
눈을 뜨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니면 발소리 없이도 아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앉으시오."
한 마디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시습은 앉았다.
둘이 마주 앉았다. 말이 없었다. 혜각은 시습을 보지 않았다. 마당의 돌을 보고 있었다. 시습은 혜각을 보았다.
이 사람은 무엇을 보는가. 돌을 보는 것인가. 아니면 돌을 통해 다른 것을 보는 것인가. 돌 너머를 보는 눈이 있다. 세종 임금의 눈이 그랬다. 이 사람의 눈도 그렇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는 눈.
바람이 불었다.
마당의 돌이 움직이지 않았다. 돌은 바람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돌 위의 먼지가 날렸다. 돌은 그대로인데 돌 위의 것은 날아갔다.
저것이다. 돌은 그대로다. 그 위의 것은 간다. 그대로인 것과 가는 것이 같은 자리에 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다르다. 그것을 이 사람은 보고 있는 것인가.
혜각이 말했다.
"어디서 왔소?"
시습이 대답했다.
"금강산 입구에서 왔습니다."
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는?"
"한양에서 왔습니다."
혜각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는?"
이 질문을 전에 들었다. 금강산 입구에서 늙은 승려가 물었다. 어디서 왔냐고. 모른다고 했다. 그때 그 승려가 웃었다. 이 사람도 같은 것을 묻고 있다. 같은 질문을 다시 묻는 것은 — 같은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답이 나왔는지 보려는 것이다.
"모릅니다."
혜각이 처음으로 시습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리고 말하지 않았다. 다시 돌을 보았다.
며칠이 흘렀다.
혜각의 암자에 머물렀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다. 밥을 먹었다. 걸었다. 앉아있었다. 저녁이 됐다. 잠이 들었다. 그것이 반복됐다.
혜각은 많이 말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말을 아끼는 것이 말이 없는 것과 달랐다. 말이 없는 사람은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을 아끼는 사람은 할 말이 있는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는가. 내가 준비될 때를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때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인가. 기다리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때가 온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혜각이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불교를 아시오?"
시습이 대답했다.
"조금 압니다."
"유교를 아시오?"
"성균관에서 배웠습니다."
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물어보겠소."
혜각이 물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오."
시습이 생각했다.
불교라면 자비라고 할 것이다. 자비는 모든 것을 품는 것이다. 고통받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유교라면 의리라고 할 것이다. 의리는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이다. 옳지 않은 것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쪽인가.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자비인가, 의리인가. 한명회의 기회를 거절한 것은 자비인가, 의리인가. 광인이 된 것은 자비인가, 의리인가.
"모르겠습니다."
혜각이 시습을 보았다.
"왜 모르오?"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 둘 다 틀린 것 같기도 합니다."
혜각이 오래 시습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자비는 무엇이오?"
"모든 것을 품는 것입니다."
"의리는 무엇이오?"
"옳은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품으면서 옳은 것을 지킬 수 있소?"
시습이 멈췄다.
그 질문이다. 모든 것을 품으면서 옳은 것을 지킨다. 옳지 않은 것도 품어야 하는가. 품으면 옳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그러나 옳지 않은 것을 품지 않으면 — 그것은 자비가 아니다. 자비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 조건 있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다.
그렇다면 의리는. 모든 것을 품으면서 의리를 지킨다. 세조가 옳지 않다. 그러나 세조도 품어야 하는가. 품으면 의리가 흔들리는가. 품지 않으면 자비가 없는 것인가.
"모순입니다."
시습이 말했다.
"둘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혜각이 처음으로 웃었다.
입가에만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눈에도 있는 웃음이었다. 배운 웃음이 아니라 느끼는 웃음이었다.
"맞소."
혜각이 계속 말했다.
"불교는 자비라 한다. 모든 것을 품으라 한다. 세조도 품으라 한다. 수양대군도 품으라 한다. 한명회도 품으라 한다. 그것이 불교의 길이오."
시습이 들었다.
"유교는 의리라 한다. 옳은 것을 지키라 한다. 세조는 옳지 않으니 따르지 말라 한다. 한명회는 그릇됐으니 거절하라 한다. 그것이 유교의 길이오."
시습이 들었다.
둘 다 맞다. 그리고 둘 다 틀리다. 자비만 있으면 — 옳지 않은 것이 판을 친다. 의리만 있으면 — 사람이 마른다. 자비가 없는 의리는 칼이 된다. 의리가 없는 자비는 물이 된다. 칼만 있으면 베인다. 물만 있으면 잠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오?"
혜각이 물었다.
시습이 오래 생각했다.
어느 쪽인가. 나는 지금까지 어느 쪽이었는가. 한명회의 기회를 거절한 것은 의리였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한 것은 자비였다. 광인이 된 것은 — 어느 쪽인가. 둘 다였다. 살기 위해서 미쳤다. 살기 위한 것이 자비인가 의리인가. 자신에 대한 자비인가. 세상에 대한 의리인가.
"둘 다입니다."
혜각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둘 다라고 하는 것은 어느 쪽도 아닌 것이오."
시습이 멈췄다.
맞다. 둘 다라고 하는 것은 어느 쪽도 확실히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 선택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서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서지 못하면 —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에 속합니까."
혜각이 이번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말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네 길이다."
그 말이 왔다.
시습은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길이다. 불교에도 속하지 않고 유교에도 속하지 않는다. 선비에도 속하지 않고 승려에도 속하지 않는다. 광인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 길이다.
위로인가. 저주인가. 모른다. 위로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주처럼도 들리지 않는다. 위로와 저주의 경계에 있는 말이다. 그 경계가 가장 진실한 말이 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위로입니까."
시습이 물었다.
혜각이 대답하지 않았다.
"저주입니까."
혜각이 또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마당의 돌이 그대로였다. 돌 위의 먼지가 날렸다.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다. 위로도 저주도 아닌 것이다. 그냥 사실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네 길이라는 것이 — 그냥 사실이다. 슬픈 사실인지 기쁜 사실인지는 — 내가 정하는 것이다.
내가 정하겠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 자유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어디든 갈 수 있다. 불교의 자비도 가져갈 수 있고 유교의 의리도 가져갈 수 있다. 두 개를 모두 들고 걸을 수 있다.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만 들고 가는 것보다 —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날 밤이었다.
시습은 암자 마당에 앉았다.
하늘을 보았다. 별이 있었다. 금강산의 별이었다. 한양의 별과 같은 별인데 — 더 많았다. 도성을 떠나면 별이 많아진다. 불빛이 없어지면 별이 많아진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혜각이 옆에 왔다.
소리 없이 왔다. 앉았다.
둘이 별을 보았다.
오래 있었다.
혜각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 시습도 말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낮의 말들이 아직 공중에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네 길이다. 그 말이 아직 들린다. 아까보다 더 가깝게 들린다. 처음 들었을 때는 멀었다. 생각할수록 가까워진다. 진짜 말은 들을 때보다 생각할 때 더 커진다.
별이 흘렀다.
유성이었다.
혜각이 그것을 보았다.
"저것이 무엇이오?"
시습이 대답했다.
"별이 흘렀습니다."
"어디로 갔소?"
"모릅니다."
"그러나 갔소?"
"갔습니다."
혜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간다. 유성이 그렇다. 나도 그렇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간다. 모르면서 가는 것이 가는 것이다. 그것을 혜각이 별로 말하고 있다. 말로 하지 않고 별로 말하는 사람이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혜각이 짐을 챙겼다.
작은 짐이었다. 보따리 하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은 떠나는 것이 빠르다.
시습이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혜각이 대답했다.
"가야 할 곳으로."
그것이 대답이다. 어디인지 말하지 않는다.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만 말한다.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어디인지 몰라도 두렵지 않다.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 두렵지 않다.
"언제 돌아오십니까."
혜각이 웃었다.
"돌아온다는 것을 정해두면 — 가는 것이 반만 가는 것이오."
맞다. 돌아올 것을 생각하면서 가면 — 완전히 가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가야 완전히 보인다. 반만 가면 반만 보인다. 혜각은 완전히 가는 사람이다. 돌아올 것을 생각하지 않고 가는 사람이다.
혜각이 보따리를 들었다.
걷기 시작했다.
시습이 그 뒷모습을 보았다.
한명회의 뒷모습과 달랐다. 한명회의 뒷모습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뒷모습이었다. 혜각의 뒷모습은 — 그냥 가는 뒷모습이었다. 이긴 것도 진 것도 없는 뒷모습이었다. 그냥 가야 할 곳으로 가는 뒷모습이었다.
몇 걸음 갔을 때 혜각이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금오산을 기억해두어라."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걸었다. 산길 속으로 걸어갔다. 작은 몸이 나무들 사이로 들어갔다. 보따리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
시습은 그 자리에 오래 서있었다.
금오산.
그 이름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금강산 입구의 승려가 말했다. 들어오시오, 라고 했다. 그러나 금오산은 말하지 않았다. 혜각이 말했다. 금오산을 기억해두어라.
금오산. 경주 남쪽에 있는 산. 거기서 무엇이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른다. 혜각도 말하지 않았다. 기억해두라고만 했다. 기억해두라는 것은 — 때가 되면 간다는 것이다. 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때가 온다. 살아있으면 때가 온다.
마당으로 돌아왔다.
돌이 있었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었다. 혜각이 떠났어도 돌은 그대로였다. 사람이 사라져도 남는 것이 있었다.
앉았다.
돌을 보았다.
혜각은 이 돌을 보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지금 나는 이 돌을 보면서 무엇을 보는가. 돌이다. 그냥 돌이다. 그러나 혜각이 보던 돌이기도 하다. 같은 돌인데 — 혜각이 보던 돌이라는 것이 더해졌다. 사람이 본 것이 남는다. 사람이 없어져도 그 사람이 본 것이 남는다. 그것이 남아있는 것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 네 길이다.
그 말이 다시 들렸다.
이번엔 위로로 들렸다.
저주가 아니다. 위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 어디든 갈 수 있다. 불교도 가져갈 수 있고 유교도 가져갈 수 있다. 자비도 가져갈 수 있고 의리도 가져갈 수 있다.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길이다. 내 길이다.
바람이 불었다.
돌이 그대로였다.
시습은 일어섰다.
간다. 금강산을 더 걷겠다. 금오산은 언젠가 갈 것이다. 때가 오면 갈 것이다. 지금은 — 걷는다. 모르면서 걷는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걷는다. 그것이 내 길이다.
금강산 봉우리가 저 너머에 있었다.
안개가 걸려있었다. 봉우리가 보이다 사라졌다. 사라졌다 보였다. 그것이 금강산이었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것. 볼 때마다 다른 것. 다 알 수 없는 것.
다 알 수 없는 것이 좋다. 다 알면 더 볼 것이 없다. 다 알 수 없어야 계속 볼 수 있다. 계속 볼 수 있어야 계속 걸을 수 있다.
시습이 걷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그것이 — 그의 길이었다.
— 11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금강산에서 나흘을 있었다. 폭포 앞에 서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시 한 수를 썼다. 그리고 불태웠다. '이 산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 처음으로 쓰고 버리는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