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금강산의 밤

이 산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

by 카미노

1457년, 금강산. 봄에서 여름으로.


폭포가 있었다.


혜각이 떠난 다음 날 시습은 폭포를 찾았다. 금강산에 폭포가 많다는 것은 알았다. 어느 폭포인지는 몰랐다. 걷다 보면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걷다 보면 만나는 것들이 있었다. 찾으면 못 만나는 것들이 걷다 보면 만나졌다.


폭포를 만났다.


크지 않았다. 거대한 폭포를 상상했는데 — 그렇지 않았다. 높지도 않았다. 소리가 컸다. 물이 많지 않은데 소리가 컸다. 좁은 곳에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좁으면 소리가 커진다. 힘이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시습은 폭포 앞에 섰다.


물보라가 얼굴에 닿았다. 차가웠다. 봄 산의 물이었다. 겨울이 녹은 물이었다. 겨울을 품었다가 내보내는 물이었다.


이 물은 어디서 왔는가. 저 위에서 왔다. 저 위는 어디인가. 더 위가 있다. 더 위는 어디인가. 계속 위가 있다. 결국 하늘에서 왔다. 비가 왔다. 비는 어디서 왔는가. 구름에서 왔다. 구름은 어디서 왔는가. 바다에서 왔다.


바다는 어디서 왔는가.


모른다. 끝이 없다. 물의 시작을 찾으면 끝이 없다. 끝이 없는 것의 시작을 찾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의미가 없는가. 모른다. 그러나 찾는 것 자체가 — 이미 무언가다.


폭포 소리가 컸다.


생각이 소리에 잠겼다. 소리가 크면 생각이 잠긴다. 생각이 잠기면 —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었다.


이상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폭포 소리가 생각을 잠그는 것이 아니라 — 생각을 씻어내는 것이다. 씻어내고 나면 남는 것이 있다. 남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남는 것이 무엇인지 보려고 했다.


보려고 하지 말아야 했다. 보려고 하면 사라진다. 그냥 있어야 했다. 폭포 앞에 그냥 있어야 했다.


시습은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있었는지 몰랐다.


눈을 떴을 때 해가 기울어있었다. 낮이 저물고 있었다. 물보라는 여전히 얼굴에 닿았다. 차가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처음의 차가움과 달랐다. 익숙해진 차가움이었다. 익숙해진 것은 더 이상 차갑지 않다. 아니 —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차가움이 나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나의 일부가 됐다. 차가움이 나의 일부가 됐다. 폭포가 나의 일부가 됐다. 금강산이 나의 일부가 됐다. 어떻게 됐는가. 오래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같이 있으면 서로의 일부가 된다. 사람도 그런가. 오래 같이 있으면 서로의 일부가 되는가.


세종 임금과 오래 있었다. 세종 임금이 나의 일부가 됐는가. 됐다. 그분의 눈이 내 안에 있다. 슬프면서 단단한 눈. 그분이 돌아가셨어도 그 눈이 내 안에 있다.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된 것이다.


스승 김반과 오래 있었다. 스승이 나의 일부가 됐는가. 됐다. 살아남아라, 라는 말이 내 안에 있다. 스승이 돌아가셔도 그 말이 내 안에 있다.


사육신과 오래 있지 못했다. 이름만 알았다. 얼굴도 몰랐다. 그러나 — 그분들이 내 안에 있다. 시신을 수습하던 그 손의 감촉이 내 안에 있다. 오래 있지 않아도 — 깊이 있으면 일부가 된다.


폭포가 흘렀다.


멈추지 않았다.


폭포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면 폭포가 아니다. 나도 멈추지 않겠다. 멈추면 나가 아닌 것이다. 걷는 것이 나다. 쓰는 것이 나다. 느끼는 것이 나다. 그것들이 멈추면 — 나가 아닌 것이다.


밤이 됐다.


폭포 옆에 자리를 잡았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서 있었다.


달이 떴다.


달빛이 폭포에 내려앉았다. 폭포가 달빛을 품고 흘렀다. 흰 것이 더 희어졌다. 빛나는 것이 더 빛났다.


달빛을 받은 폭포가 다르다. 같은 폭포인데 달빛을 받으면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빛이 더해졌다. 빛이 더해지면 다르게 보인다. 같은 것인데 무엇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나도 그런가. 나는 같은 나인데 —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 다른 나가 되는가. 세종 임금의 말을 받았을 때의 나. 스승의 말을 받았을 때의 나. 혜각의 말을 받았을 때의 나. 같은 나인데 — 다른 나였다. 받는 것이 나를 다르게 만들었다.


붓이 없었다.


그러나 쓰고 싶었다. 쓰고 싶다는 것이 왔다.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막으면 안쪽에서 쌓였다. 쌓이면 더 무거워졌다. 내보내야 했다.


나뭇가지를 찾았다. 끝이 뾰족한 것으로. 흙이 있는 곳을 찾았다. 달빛이 닿는 곳을 찾았다.


쪼그려 앉았다.


쓰기 시작했다.


폭포는 어디서 왔는가

하늘에서 왔다

하늘은 어디서 왔는가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폭포다

모르면서 흐르는 것이 폭포다

나도 모른다

나도 흐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썼다.


다 쓰고 나서 오래 보았다.


흙 위에 새긴 글자들이었다. 나뭇가지로 새긴 것이었다. 붓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종이 위에 쓴 것이 아니었다. 흙 위에 새긴 것이었다.


이것이 시인가. 시라고 할 수 있는가. 형식이 없다. 운율이 없다. 한자가 아니다. 그냥 말이다. 그냥 생각이다. 그러나 — 내보냈다.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내보냈다. 내보내면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면 더 걸을 수 있다. 그것이 쓰는 이유인가.


오래 그 글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손으로 지웠다.


흙 위의 글자들이 사라졌다. 손바닥으로 쓸었다. 한 번, 두 번. 글자가 없어졌다. 흙이 다시 흙이 됐다.


사라졌다. 그러나 있었다.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흙이 기억하는가. 모른다. 그러나 내가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면 있는 것이다. 내가 없어지면 이 시도 없어지는가. 그때까지는 있는 것이다.




이틀을 더 있었다.


폭포 앞에 있었다. 걸었다. 봉우리를 올랐다. 내려왔다. 밥을 먹었다. 먹을 것이 없으면 굶었다. 굶으면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면 다시 먹을 것을 찾았다.


세 번째 밤이었다.


불을 피웠다. 작은 불이었다. 나뭇가지를 모아서 피웠다.


낮에 나뭇잎에 썼다. 붓이 없었으니 손가락으로 썼다. 이슬에 젖은 나뭇잎 위에 손가락으로 눌러 썼다. 글자가 남지 않았다. 그러나 썼다. 쓰는 행위가 있었다. 행위는 결과가 아니다. 행위 자체가 있는 것이다.


그 나뭇잎을 불에 넣었다.


탔다.


나뭇잎이 말리며 검어졌다. 글자가 있던 자리가 먼저 탔다. 글자가 없던 자리보다 먼저 탔다. 이유를 몰랐다.


그냥 그랬다.


불에 탄다. 글자가 불에 탄다. 충청도 길 위에서 책을 불태웠다. 그때는 버리는 것이었다. 지금은 — 다르다. 지금은 내보내는 것이다. 버리는 것과 내보내는 것은 다르다. 버리는 것은 없애는 것이다. 내보내는 것은 —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자유롭게 한다. 내 손에서 자유롭게 한다. 종이에 묶이지 않게 한다. 산이 기억하게 한다.


불이 작아졌다.


나뭇잎이 재가 됐다.


시습은 그 재를 보았다.


이 산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 말이 왔다.


이 산이 기억한다. 내가 여기서 썼다는 것을. 내가 여기서 느꼈다는 것을. 내가 여기서 불태웠다는 것을. 산은 오래간다. 사람보다 오래간다. 산이 기억하면 — 오래 기억된다. 나는 사라져도 이 산이 기억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재가 바람에 날렸다.


흩어졌다.


산 속으로 들어갔다.


재가 산이 됐다. 내가 쓴 것이 산이 됐다. 산의 일부가 됐다. 그것이 기억되는 방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되는 것이 있다.


나흘째 아침이었다.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금강산에서 할 것을 했다. 더 있을 수도 있었다. 더 있으면 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있는 것이 맞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가 있다. 더 있고 싶을 때 떠나야 한다. 더 있고 싶지 않을 때 떠나면 — 이미 늦은 것이다.


짐을 챙겼다.


짐이 없었다. 챙길 것이 없었다. 몸이 짐이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짐을 챙기는 것이었다.


걷기 시작했다.


산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생각했다.


폭포를 보았다. 폭포 앞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선명해진 것들을 썼다. 쓰고 불태웠다. 이 산이 기억하게 했다.


처음으로 쓰고 버리는 것을 배웠다.


그 생각이 왔다.


썼다. 그리고 버렸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내보냈다. 내보내고 나서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채로 내려간다.


그런데.


걸음이 잠깐 멈췄다.


나는 왜 계속 쓰는가.


그 질문이 왔다.


읽힐 곳이 없는데도. 이 산은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나 산이 읽는 것인가. 산이 읽지는 않는다. 바람이 읽는 것인가. 바람도 읽지는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는데 — 나는 왜 쓰는가.


답이 없었다.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먹는다.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가. 쓰지 않으면 무너지는가.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모른다. 쓰지 않아본 적이 없다. 책을 태운 날도 — 머릿속에서 쓰고 있었다. 말을 잃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지만 — 안에서는 쓰고 있었다. 멈춘 적이 없었다.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멈출 수 없다면 — 쓰는 것이 숨 쉬는 것이다. 숨 쉬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숨 쉬어야 하기 때문에 숨 쉰다. 쓰는 것도 그렇다. 써야 하기 때문에 쓴다. 이유가 없다. 이유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읽힐 곳이 없어도 쓰는가.


그렇다. 읽힐 곳이 없어도 쓴다. 숨 쉴 곳이 없어도 숨 쉬는 것처럼. 아무도 듣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읽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쓰는 것이 목적이다.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산 중턱이었다.


잠깐 멈췄다.


금강산을 돌아보았다.


봉우리들이 있었다. 안개가 걸려있었다. 다 보이지 않았다. 볼수록 더 많은 것이 숨어있는 것 같은 산이었다.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을 것 같은 산이었다.


이 산이 나를 기억하는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산을 기억한다. 폭포를 기억한다. 달빛을 기억한다. 재가 바람에 날리던 것을 기억한다. 이 기억이 나의 일부가 됐다. 이 산이 나의 일부가 됐다.


혜각이 말했다. 금오산을 기억해두어라. 기억해두겠다. 때가 오면 갈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때가 오면 알 것이다. 때는 설명 없이 온다. 설명 없이 오는 것이 때다.


바람이 불었다.


금강산 봉우리 위의 안개가 움직였다. 잠깐 걷혔다가 다시 덮였다. 잠깐 보이다가 다시 안 보였다.


잠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잠깐 보이는 것들이 오래 보이는 것들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잠깐 보이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잠깐인 것들이 더 깊이 남는다.


시습은 돌아섰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걸음이 가벼웠다. 올라올 때보다 가벼웠다. 올라올 때는 아무것도 없이 가벼웠다. 내려갈 때는 — 무언가를 내보내고 가벼웠다. 같은 가벼움이 아니었다. 비어서 가벼운 것과 내보내서 가벼운 것은 달랐다.


비어서 가벼운 것은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내보내서 가벼운 것은 —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된 것이다. 지금 나는 내보내서 가벼운 것이다.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됐다.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른다. 걷다 보면 채워질 것이 온다.

산 아래에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길이었다.


저 길이다. 모르면서 가는 길이다. 읽힐 곳이 없어도 쓰면서 가는 길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가는 길이다. 이 산이 기억하는 길이다.


시습이 그 길로 들어섰다.


안개가 그를 감쌌다.


금강산이 등 뒤에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 12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며칠째 들리는 발소리였다. 시습은 알고 있었다. 세조 측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시습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밀정이 먼저 지쳤다.“


작품 속 시는 소설적 허구로 창작된 것입니다. 실제 김시습의 작품이 아닙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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