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첫 번째 밤

처음으로 웃었다

by 카미노

1456년, 한양 동쪽 길. 가을.


밤이 됐다.


시습은 걸음을 멈췄다.


길 옆에 작은 언덕이 있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바람막이가 될 것 같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붕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늘 밤은 하늘이 지붕이었다.


시습은 언덕 위에 올라갔다.


소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땅이 차가웠다. 가을 땅이었다. 이슬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옷이 조금씩 젖을 것이었다. 알았다. 알면서 누웠다.


차갑다.


그렇다. 차갑다. 그러나 차갑다는 것이 나쁜 것인가. 차갑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차갑다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가움은 나쁜 것이 아니다.


누웠다.


하늘이 보였다.


별이 있었다.


처음 보는 하늘이 아니었다. 수없이 본 하늘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지붕 없이 보는 하늘이었다. 벽 없이 보는 하늘이었다. 막힌 것이 없는 하늘이었다.


이렇게 넓은 것이었는가.


하늘이 이렇게 넓은 것인지 몰랐다. 방 안에서 보는 하늘은 창문 크기였다. 마루에서 보는 하늘은 처마 사이 크기였다. 지금 보는 하늘은 — 끝이 없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없는 것이 있다. 하늘이 끝이 없다. 공부가 끝이 없다고 이계전이 말했다. 그때는 공부 이야기인 줄 알았다. 지금 보니 하늘 이야기였다. 끝이 없는 것들이 있다. 끝이 없는 것들은 두렵지 않다. 끝이 없으면 계속 갈 수 있으니까.


별이 하나씩 나왔다.


어두워질수록 더 많이 나왔다. 어두울수록 별이 많아지는 것이 이상했다. 어두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 어두울수록 더 많이 보였다. 별이라는 것이 그랬다. 밝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야 보였다.


밝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어두워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지금 어두운 곳에 있다. 한양을 떠났다. 집이 없다. 벼슬이 없다. 이름이 없다. 미래가 없다. 어둡다. 그러나 — 보이는 것이 있다. 밝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무엇이 보이는가.


하늘이 보인다. 별이 보인다. 그리고 — 나 자신이 보인다.


시를 생각했다.


세종 임금과 함께 읽던 시들. 다섯 살부터 읽은 시들. 책과 함께 태웠어야 했는데 — 태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몸에 새겨진 것들은 태워지지 않았다.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은 것들은 — 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임금과 함께 읽던 시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시습은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를 냈다. 낮은 소리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소나무만 있었다. 소나무에게 읊어주어도 괜찮았다. 소나무는 판단하지 않았다.


바람 앞에 등불 하나

꺼질 것 같으면서 꺼지지 않는다

꺼지지 않는 것이 용감한 것인가

아니면 꺼질 줄 모르는 것인가


읊고 나서 오래 있었다.


꺼질 줄 모르는 등불. 나는 지금 그것인가. 용감해서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꺼질 줄 몰라서 살아있는 것인가. 모른다. 그러나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 먼저다. 왜 살아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도 된다.


세종 임금이 그 시를 좋아하셨다.


이 시를 읊을 때 임금의 눈이 달라졌다. 슬프던 눈이 잠깐 다른 것이 됐다. 무엇이 됐는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안다. 자신을 보는 눈이 됐다. 임금도 꺼질 것 같으면서 꺼지지 않는 등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임금이기 때문에. 이 시를 읽으면서 잠깐 — 자신이 보였을 것이다.


임금이시여. 저도 지금 보입니다. 이 어두운 하늘 아래서 — 저 자신이 보입니다.


배가 고팠다.


진짜로 고팠다. 오늘 밥을 먹지 않았다. 어머니의 무덤에 갔고 노파를 만났고 동쪽으로 걸었다. 먹을 것을 챙기지 않았다. 챙길 것이 없었다. 돈이 없었다. 광인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가끔 있었지만 — 오늘은 없었다.


배가 고프다.


그렇다.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몸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살고 싶은 몸이 있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 있는 것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이다. 집도 없고 이름도 없고 미래도 없지만 — 살고 싶은 몸이 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충분하다. 지금은 충분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이 왔다.


웃음이었다.


이유가 없었다. 웃을 이유가 없었다. 배가 고프고 춥고 땅 위에 누워있었다. 집이 없었다. 내일이 없었다.

그런데 웃음이 왔다.


이것이 무엇인가.


막을 수 없었다.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왔다. 배에서 올라왔다. 가슴을 지나 목으로 올라왔다.

입 밖으로 나왔다.


소리가 났다.


웃음소리였다.


소나무가 흔들렸다.


바람이 분 것이었다. 그러나 시습은 소나무가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같이 웃는 것 같다고.

웃음이 나오는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안다. 알면서 모른다. 이것이 자유의 웃음인가. 이유 없는 웃음이 자유의 웃음인가. 이유 있는 웃음은 배운 웃음이다. 기쁜 일이 있어서 웃고, 좋은 것을 받아서 웃는다. 그것은 반응이다. 반응은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응이 아니다. 배에서 올라온 것이다. 배에서 올라온 것은 배울 수 없다. 배울 수 없는 것이 진짜다. 이것이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웃는 것이다.


한참 웃었다.


웃다가 멈췄다. 멈추고 보니 눈물이 나 있었다. 언제 나왔는지 몰랐다. 웃으면서 울었던 것인지, 울면서 웃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웃음과 울음이 같이 있을 수 있는가. 있다. 지금 같이 있다. 웃음과 울음이 같이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 감정이 가장 진짜인 감정이다. 이름이 붙으면 작아진다. 이름이 없으면 — 크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시습은 손으로 눈을 닦았다.


하늘을 다시 보았다.


별이 가득했다. 아까보다 많아진 것 같았다. 눈이 익숙해진 것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더 많이 보인다. 어둠이 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익숙해지면 친구가 된다.


자유란 이런 것인가.


그 생각이 왔다.


자유란 이런 것인가. 춥고 배고프다. 땅 위에 누워있다. 집이 없다. 이름이 없다. 내일이 없다. 그런데 — 왜 이렇게 가벼운가.


가볍다. 이상하게 가볍다. 한양에 있을 때 이 무게가 있었다. 이름의 무게. 미래의 무게. 기대의 무게. 그 무게들이 지금 없다. 버렸다. 버릴수록 가벼워졌다. 그것이 자유인가.


그렇다. 그것이 자유다. 자유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자유는 춥고 배고프다. 그러나 자유는 가볍다. 가벼운 것이 아름다운 것보다 더 오래간다. 아름다운 것은 무거울 수 있다. 가벼운 것은 — 날 수 있다.




밤이 깊어졌다.


소나무 소리가 낮아졌다. 바람이 잦아들었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인지 눈이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별이 움직인다. 아주 천천히. 밤새 움직인다. 아침이 되면 저 별들이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빛에 가려지는 것이다. 빛이 약해지면 다시 나온다.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도 그런가. 한양에서 사라졌다. 이름이 사라졌다. 미래가 사라졌다. 그러나 — 사라진 것인가. 빛에 가려진 것인가. 어둠 속에서는 보이는 것이 있다. 나는 지금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인다.


세종 임금을 생각했다.


임금이시여. 저는 지금 하늘 아래 누워있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런 밤을 경험하셨습니까. 궁궐 안에서 경복궁 지붕 너머 하늘을 보셨겠지요. 지붕이 있었을 것입니다. 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지붕도 벽도 없습니다.


그것이 슬픈 것인가. 아닙니다. 임금이시여. 지붕이 없으면 하늘이 지붕입니다. 벽이 없으면 산이 벽입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됩니다. 없어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셨는데 — 눈이 슬프셨습니다. 다섯 살에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가지면 가질 것이 없어집니다. 가질 것이 없어지면 눈이 슬퍼집니다. 저는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눈이 슬프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임금이시여. 공부가 끝나는 날이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알았습니다. 하늘도 끝이 없습니다. 별도 끝이 없습니다. 자유도 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 없으면 — 모든 것이 계속 갈 수 있습니다.

별이 흘렀다.


유성이었다. 하나가 흘렀다. 사라졌다.


저것은 어디로 가는가. 모른다. 그러나 가고 있다. 모르면서 가고 있다. 나도 그렇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 가고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잠이 들었다.


춥고 배고팠다. 그러나 가벼웠다. 가벼운 채로 잠이 들었다. 처음으로 진짜 웃음을 웃은 날이었다. 처음으로 하늘 아래 혼자 누운 밤이었다.




아침이 됐다.


새소리가 먼저 왔다. 그 다음 빛이 왔다. 빛이 눈꺼풀을 통과했다. 붉은 빛이었다.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빛이 왔다. 빛은 눈을 뜨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왔다.


시습은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이 아니었다. 새벽하늘이었다. 남색이었다가 점점 밝아졌다. 별들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빛에 가려지는 것이었다.


별은 있다. 빛이 와도 별은 있다. 빛이 가면 다시 보일 것이다.


일어났다.


몸이 뻐근했다. 이슬이 옷에 내려앉아 있었다. 차가웠다. 그러나 어젯밤만큼 차갑지 않았다. 몸이 익숙해진 것이었다.


몸이 익숙해진다. 처음엔 차갑다고 느꼈는데 이제 그냥 아침이다. 몸은 적응한다. 몸이 먼저 적응하고 머리가 나중에 적응한다. 몸이 더 빠르다.


일어서서 하늘을 보았다.


동쪽이 밝았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올 것이라는 빛이 먼저 왔다. 해보다 빛이 먼저 온다. 준비가 먼저 온다. 준비가 있으면 해가 온다.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을 했다. 매일 아침 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어제의 방향과 오늘의 방향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일 물어야 했다. 물어보지 않으면 어제와 같은 방향으로 그냥 가게 된다. 그냥 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었다. 걷는 것이 아니었다.


동쪽이다.


왜 동쪽인가. 해가 뜨는 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 금강산이 있는 쪽이기 때문이다.


금강산.


그 이름이 떠올랐다. 언제부터 그 이름이 있었는지 몰랐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이름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 일만이천 봉우리. 사람들이 평생에 한 번 보고 싶어하는 산.


왜 금강산인가. 모른다. 그러나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부른다. 이름이 부르는 경우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부름이 있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맞다. 설명할 수 있는 것만 따라가면 —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놓친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안에 진짜가 있다.


시습은 동쪽을 향했다.


해가 뜨는 쪽이었다. 금강산이 있는 쪽이었다. 아직 뜨지 않은 해가 있는 쪽이었다.


간다.


금강산이 어떤 곳인지 모른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지 모른다. 찾아야 할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다. 모르면서 간다. 부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된다. 이유를 알고 가면 — 이유 만큼만 간다. 이유 없이 가면 — 이유보다 더 멀리 간다.


걷기 시작했다.


첫 걸음이었다. 한양을 떠난 진짜 첫 걸음이었다. 어제도 걸었지만 어제는 어머니의 무덤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오늘이 진짜 첫 걸음이었다.


첫 걸음이 가장 무겁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첫 걸음이 가볍다. 어젯밤에 이미 무거운 것들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별 아래서 웃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을 두고 왔으면 첫 걸음이 가볍다.


해가 떴다.


동쪽 산 너머에서 떴다. 빛이 쏟아졌다. 길 위에 빛이 내려앉았다. 시습의 그림자가 서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가 서쪽으로 간다. 나는 동쪽으로 간다. 그림자와 나는 반대 방향이다. 그림자는 뒤다. 나는 앞이다. 뒤를 두고 앞으로 간다. 뒤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갈수록 그림자는 따라온다. 버린 것들이 따라오는 것이다. 버렸어도 따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이 나를 만든 것들이다.


길이 이어졌다.


금강산이 있는 쪽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며칠인지 몇 달인지 몰랐다. 몰라도 됐다. 걷다 보면 도착한다. 도착하지 못하면 그것도 괜찮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모르면서 걷는다.


그것이 걷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8화로 이어집니다 —

다음 화 예고: "걸으면서 여러 이름을 만들었다. 동봉. 벽산. 설잠. 이름을 바꿀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지만 — 나는 똑같았다. '이름을 버린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이름이 없는 나는 — 더 나인가, 덜 나인가.“


작품 속 시는 소설적 허구로 창작된 것입니다. 실제 김시습의 작품이 아닙니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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