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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Aug 29. 2024

<나만의 키워드에 갇힌 채>8화

-"저, 차 태워 주세요. 저, 버스 타고 왔어요." "바로 갈게요." 

<저, 버스 타고 왔어요. 저, 차 좀 태워 주세요> 제목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창작 소설을 쓰고 싶다. 오래전부터 기획한 주제다. 내 휴대폰의 메모지에 적혀 있다. 오피스 와이프, 오피스 허즈번드에 대한 키워드를 보고 생각해 봤다. 



우리 부류는 다 이렇게 산다. 뭐가 잘못 됐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남편을 천군만마 옆에 끼고 나를 추궁하듯, 심판하듯 콧구멍에서 불이 나듯 몰아붙인다. 


회오리바람이 분다. 그녀 옆의 남자, 그녀 앞의 남자도 말은 없다. 단지 그녀처럼 나를 추궁하듯 보고 있다. 무심한 듯 서 있지만 두 남자는 이 여자는 잘못한 게 없다. 잘못은 당신이다. 왜 이 여자를 의심하냐? 

다 사회생활이다. 


누가 잘못한 걸까?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점심 식사 같이 할래요."


이야기의 끝은 비극적이다. 카카오톡에 흔적처럼 남은 그들만의 대화, 사회생활일까? 업무 이야기는 한 문장도 없다. 그들만의 대화뿐이다.


"저, 버스 타고 왔어요. 저, 차 좀 태워주세요."

시작으로 일대 일 둘만의 카카오톡에 담긴 말들이 사적생활에 더 가까운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차'라는 공간을 잘 이용한다. 남녀의 사랑도 만남도 비극도 차로 시작되고 끝난다. 차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손을 잡았다. 키스를 했다. 프러포즈를 차에서 했다. '차'가 하나의 공간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차'는 현대인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직장'은 가정보다 가족보다 아내보다 남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오늘날에 쓰이는 이런 말들, 하우스키퍼, 오피스와이프, 오피스허즈번드의 시작과 끝은 공간이다. 공간은 시간을 세우기도 하고 부르기도 한다. 때로는 공간은 사람을 부르기도 한다.


"바로 갈게요."

대답의 속도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답이다. 그 깔끔한 답, '바로' 부사가 다 말해주고 있다.

그 여자한테 달려간 그 말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를 블랙홀로 빨아들였다.


"잠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요즘 보지 못했었던 밝고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들어온 남편은

"마트에는 내일 가요."

구정 선물을 오늘 샀어야 일정이 맞다. 빠듯하다. 오늘 오후 예정한 그 시간에 준비해 두어야 일정이 맞는데, 걱정이 앞선다. 내일모레가 설이니, 오늘 준비하고, 내일 줘야 되는데, 오늘 일정보다 더 중요한 내가 모르는 일정이 있었던 걸까?


그날은 세월 속에 묻혀서(6개월 정도) 그냥 지나간 어느 날 뿐이었다. 



나의 일상은 깨질 때로 자꾸만 깨져갔었다. 상처와 고통, 아픔에 뒤척이며 잠 못 드는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나의 지나간 아름다웠던 추억의 사진이 보고 싶었다. 한 번도 보지 않았고, 열람하지 않았던 남편의 휴대폰 갤러리에 담긴 내 지나간 사진들이 보고 싶어졌다.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 아프게 내 지나간 사진들을 보고 있을 때 그때 나는 어떤 한 여자를 보았다. 

몇 번 만난 내가 아는 여자였다. 


나는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남편을 존중한다고 했었고, 남편은 그 여자가 고맙다고 했었다. 존중한다. 고맙다. 여기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은 뭘까? 존중한다, 고맙다, 다 좋은 말이 아닌가? 그런데 존중한다. 고맙다는 왜 다른 여자를 힘들게 했을까? 다 좋은 말인데.


밥 먹는 사이는 뭘까?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는 걸 뻔히 알고 있는 여자가 근무 중에 있는 남자에게 '차를 태워 달라고'요청할 수 있는 그건 뭘까?

'바로 갈게요'라고 가는 남자의 말과 행동은 뭘까?

"아는 여직원이다."

"바람 쐬고 왔다."

아는 여직원과 바람을 쐬고 왔다, 아내는 사업장에서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데(이쪽 사업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일을 다 맡겨놓고) 27년 동안 알았던 남자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속수무책,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 사업장의 어려운 일들, 힘든 일들을 뻔히 다 알고 있는 여자였다.

나는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비밀은 뭘까? 

부부 사이가 좋으신 데 저는 그럴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선배, 후배처럼 지냈어요. 선배, 후배 사이로 지냈다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는 아이러니하다,라는 키워드가 있었다.

"가슴이 시려요. 가슴이 먹먹해요. 제게는 버팀목이었어요."

그녀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보낸 톡 같았다. 남편의 명예퇴임식 이후에 온 어느 날 밤에 보낸 그 말들, 가슴이 시리다. 가슴이 먹먹하다. 버팀목이다.

어떻게 하면 한 여자가 가슴이 시리다, 가슴이 먹먹하다, 버팀목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남편의 명예퇴임식 날 송사에서 눈물을 참고 써 온 글을 읽던 그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 몰래 그 여자 몰래 찍은 두 장의 사진과 그 사진을 찍은 각도가 내내 맴돌았다.



수수께끼? 숨바꼭질? 숨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어쩌면 못 찾을 수도 있다. 실종, 이라는 키워드가 있지 않은가.


남자는 의심하고 추궁하는 여자에게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라고 고함을 친다. 남자가 원하는 대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들한테 나는 물어보았다. 택시를 탔을 때 운전자의 얼굴은 굳이 보지 않으니까, 볼 필요가 없으니까, 연령대가 다른 남자들한테, 내 남편을, 그 여자를 모르는  다른 여자들한테 물어보니, 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담자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그 여자한테서 냄새가 난다, 그 남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사업을 아내한테 맡겨놓고, 돌아오는 말들은 더 의심을, 의혹을 먼지처럼 일으켰었다. 


남편의 명예퇴임식 날, 식을 마치고 식사하러 이동하는 그 길을 그 여자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 내용은 전혀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시아버지 장례식 때도 부부가 조문을 와주었고, 우리 센터 개원식에도 축하해 주러 왔었다. 바로 그 여자, 나는 그 여자가 궁금해졌다. 어떤 여자인가?


그 여자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는 묘하게 섹시한 모습으로 서 있는, 블랙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고 살짝 뒤를 보는 김희애 여배우의 모습 사진이 있었다. 이 포즈는 배신한 남편에 대한 그녀의 불꽃같은 분노로 다른 남자와 함께 하려고 입었던 원피스다. 그 원피스를 입고 호텔 방에서 상대 남자를 유혹하듯 쳐다보는 포즈다. 바로 얼마 전에 <부부의 세계>가 방영되었다. 다음 사진은 그 여주인공(김희애 여배우)을 배신한 섹시한 남편의 모습도 보였다.  이런 사진들을 자신의 프로필 안에 두는가? 기이하다.


여자의 깊은 심연 안에는 어떤 욕망이 꿈틀거릴까? 프로필 사진도 묘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블랙레이스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은 미디엄 길이의 헤어펌을 한 여자가 지긋한 눈빛의 농염한 모습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아주 섹시한 포즈의 사진이었다.


굉장하다. 이런 섹시한 모습의 사진을 초등학생 두 딸이 있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한국에서 꽤 공신력 있는 직장에 다니는, 직장에서 과장급의 직책을 가진 여자의 카카오톡의 프로필 사진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기에는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이해하기가 난해했다.


그녀의 세상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감정으로 채워져 있는가?


이제, 이 여자는 자신이 속한 곳은 다 이렇게 산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배우자가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데, 근무시간에 자신이 버스 타고 왔다고, 저, 차 좀 태워 주세요. 그 말이 상식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카톡으로 보낸 이 말을 어디에서도 하지 마라, 만약 말하면 명예훼손 고소를 할 거다,라고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존중했었다는 내 남편 앞에서 그 공신력 있는 직장과 남편과 나의 직장을 상대로 명예훼손을 할 거라고 협박하고 있다. 어느새 내 남편은 을이 되어 있었고, 여자는 갑이 되어 있었다. 

여자가 공신력 있는 직장에 입사했을 때부터 봐왔었던 남편, 함께 일했었던 남편, 그런데 이 여자는 나의 직장과 나와 남편을 상대로 명예훼손 협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앞에서 그녀가 원했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원했던 장소까지 차를 태워준 내 남편을 어린애 나무라듯 야단치고 있다.


"건강한 성인이면 그때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우두커니 있는, 무심한 남편의 행동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힘이 들었다. 그런 그 여자의 말에 그 어떤 토도 달지 못하는 남자, 그 여자를 혼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남자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못 잡아서 불렀어요."

그녀가 내 남편을 불러낸 곳을 확인하러 가보니 그 커피숍 앞은 사거리였었고, 그 커피숍 바로 앞에 택시 승강장이 무려 3군데 있었다. 그녀는 얼마든지 택시를 스스로 혼자 탈 수 있었다.

"그런 좋은 직장에 다니는 여자가 그런 지위에 있는 여자가 택시를 못 잡아서 불렀다. 말이 되냐?"

"갑자기 전화하셔서 왜 차를 태워 달라고 했느냐? 물어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참 대답이 궁색하다. 남자가 바로 갈게요,라고 나간 이유가 사회생활이라고 하면서 나를 사회생활 이해 못 하는 여자로 몰아붙이더니, 이 여자는 내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택시를 못 잡아서 불렀다는 말로 내가 갑자기 전화를 한 게 문제라고 몰아붙인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선 넘은 말과 행동을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책임전가를 한다.


"저, 차 좀 태워 주세요. 저, 버스 타고 왔어요."

시작은 그녀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갑이 되어서 명예훼손, 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있다. 


나를 말벌처럼 쏘아보고 있다. 성난 말벌의 여왕, 딱 맞는 말이다. 내 남편 앞에서 당당하다. 16살 연하의 여자가 나를 나무라듯이 말하고 있다. 어떻게 저 당당함이 나올 수 있을까? 저 당당함의 근원은 어디일까?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센터명으로 상담하러 왔어야 됐어요."

"개인 이름으로 상담하러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참 어이가 없다. 아주 사적인 볼일로 내 남편을 불러낸 여자의 말에서 나온 말이 그 여자의 아주 사적인 볼일 때문에 생긴 일인데, 그 볼일에 대해 센터명으로 상담을 했어야 했다고 한다. 


큰 조직의 직장문화에 대해서, 그런 직장에 다닌 중간 관리자급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약자에 대한 칼부림, 그들의 합리화, 참기가 어려웠었다. 그녀는 40대 중반이었는데 갓 사회생활을 하는 순진한 말들을 쏟아냈었다. 카카오톡에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실제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카톡에 담긴 사진들, 그녀의 세계는 의혹적이었다. 



그녀는 악녀였을까? 귀인이었을까? 


그녀를 지우기 위해서 몸부림쳤었던 수많은 시간들, 잠 못 들고 고민에 고민에, 의혹에 의혹에, 아프고 쓰렸던 그 시간들, 아무도 없는 무서운 그 밤거리를 헤매고,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이른 새벽거리를 헤매고 다녔었던 그 수많은 나날들,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았던 그녀의 말들이 맴돌았다. 그녀의 썩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비웃는 입술의 움직임, 내 앞에서 내 남편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그녀의 당당한 목소리, 말들, 

나는 미친년이 되어서 악 쓰고, 고함치고, 물건을 던지고, 아무도 없는 밤거리, 새벽거리를 속을 태울 수도, 삭힐 수도 없어서 헤매었던 그 수많은 나날들, 나의 그런 모습은 어떤 누구도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비통했었다. 

비참한 내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부장선생님, 담당선생님, 다른 강사들, 학부모들, 학생들에게 인기 많았던 눈부셨었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울부짖었다.


"난, 너무 억울해!"

"내가 이러려고 사업을 한 게 아니야!"


억울함과 분노, 원망으로 가득 차었다. 

일그러진 나의 초상화, 

나는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1년의 연애, 결혼생활 27년, 모래성을 쌓았다.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나에게 책임전가하는 그, 이 사업장을 한 날부터 그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었다. 나는 이 사업장을 하기로 허락을 했고, 이 사업장을 함께 하고 있는 그 잘못된 선택으로 점점 알 수 없는 미궁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각자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데, 나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 누구의 잘못일까? 미쳐가고 있는 나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는 그는 왜 방관의 방법만 선택했을까? 27년 동안 함께 말하고 생활하고 살아온 사람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중,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내가 알고 있었던 남편은? 나는 누구와 살고 있는가?




새벽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가 어느새 아침이 되니 비가 그쳤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햇살이 눈부시다. 


이제는 생각이 거의 나지 않는다. 상처에 흉터로 남아 있다. 마데카솔 연고를 잘 바르면 깜쪽같이 없어질 흉터로 남아 있다. 살색보다는 진한지만 옅게 내 피부색이 희끗희끗 보이고 있다. 멀지 않아 내 피부색으로 돌아올 것 같다. 


하루도 지울 수 없었던 그녀, 그런데 나는 멀쩡하게 한 5개월을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고요한 아침, 소파에 깊숙이 앉아서 거실 창 밖의 하늘과 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벌떡 똑바로 앉았다. 순간 잊고 있었던 내 꿈이 떠올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또 꿈속에서도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작가가 되어 그녀에 대해서 쓰고 싶은 게 있었다. 

그녀가 잘못했다. 


그런데 나는 작가가 되어서 나의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다. 

갑자기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도 이제는 을이 아니구나.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직장에 잘 다니고 있을까?(그런 직장에 다니는 것을 갑으로 안 여자)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두 자녀를 예쁘게 잘 키우고 있을까? 남편에게 사랑을 받고 있을까? 멀쩡한 마음으로 소소한 일상을 재밌게 꾸려내고 있을까?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은 깨끗한 여자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떳떳했을까?

키워드는 선택이다. 취소하면 삭제된다. 그녀는 취소하고 삭제하고 살았을까? 


그 키워드들을 취소하고 삭제하는 시간이 나는 아주 오래 걸렸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키워드를 선택도 하고 취소도 하고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남아 있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품격 있는 우정이었을까.



( 그녀는 내 남편을 '버팀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에 대해 '사회생활'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생활에서 그녀의 미약한 힘이라도 필요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사회생활에서 그가 정신적 위안이었고, 지주였고, 그녀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줄 수 있는 버팀목이었는 것 같다. 


나도 그녀가 말했었던 '버팀목'이 필요했었다. 그녀가 힘들었을 때 그가 필요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그 위험하고 공포스러웠던 무서운 공간, 시간, 사람들, 그 상황 속에서 나도 그녀처럼 '버팀목'이 필요했었다. )


- 이 글은 수많은 밤을 잠 못 들고, 눈물로 지새운 세상의 상처받은 그녀들을 위해 바칩니다. 

- 상처와 고통, 아픔을 딛고 일어서니, 새롭고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단해졌고, 나는 그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알게 됐습니다. 이제 나는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여자가 됐습니다. 

- 그러나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보다 미안하다가 먼저였다고. 잘못했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어야 했다고. 나를 더 이상 미친 여자로 몰아붙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였다면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비참하게 몰아가서는 안 되었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 작가의 말 : 나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유는 아닙니다. 현실은 항상 현재이며, 아름다웠던 순수했던 과거는 돌아갈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단지 내 인생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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