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일까(11화)

- 나랑, 하자! / 속단하지 마 / 나도 생각이란 걸 하고 있어.

by 김현정

"당신은 예술가구나!"

오른쪽 손을 오른쪽 뺨에 갖다 댄 채로,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그의 표정에는 예상 밖이라는, 그런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귀신을 보고 얼어붙은 그런 놀람의 표정에는, 경이로운 눈빛! 까지 서려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원래의 안정된, 그만의 따뜻한 정서로 바뀌어 가는, 그 찰나의 얼굴 모습을 그녀는 관찰하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은 예술가구나!" 그 말도 놀랐지만 그녀에게는 그의 얼굴의 표정이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에게 꺼낸 말, "나는 앞으로 예술가로 살겠습니다." 그녀의 삶의 방향성의 말, 그 말을 그에게 가장 먼저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가 그렇게 그녀에 대해서 선언한 말, 그녀를 인정해 준 말, 그 문장은 한참 동안 그녀를 괴롭혔었다. 따라붙어서,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파곤 했었다.


그의 얼굴에서 그렇게 놀란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표정이 그녀에게는 낯설기도 했지만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런 마음도 들었다. 그가 그날 어떻게 그런 놀라운 말을 꺼내었는지, 그녀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 말에 이어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내재된."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왜? 그때, 그 순간에는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당신은 어째서 내게 그런 말을 하게 되었나요? 왜? 그때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녀는 덤덤했다. 너무나 침착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얼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그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그의 놀라운 말에도 미동도 하지 않은 그녀에 대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의문을 가졌을까?



한동안, 천둥과 번개가 치는 늦은 저녁, 으스름한 차가운 빗물이 운동화를 적실 때 - 그런 저녁에, 교각 위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었다.

'원래, 삶은 파노라마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저 거센 물결처럼 또 지나가겠지. 늘 그래왔듯 난 또 이겨내는 거지.'



그녀가 남편에게 던진 말,

그녀 인생의 돌파구로 던진 말,

"나는 앞으로 예술가로 살 거예요."


그리고 그 후,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들,

"분위기가 예술가예요."

"예술가 같아요."


그녀 눈앞에 있는 그가 - 홈런을 치듯, 연구자가 위대한 발견을 한 듯, 고고학자가 대단한 유적지를 발견한 듯, 바로 그런 눈빛으로,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당신은 예술가구나!"


그러나 오히려 그 순간에 그녀는 침착했다. 그의 표정, 그의 말투, 그를 관찰했다. 그가 드디어 내 진가를 알게 된 건가. 그녀조차도 그녀 자신에게 놀랐다. 그가 놀람에 가까운, 경이로운 발견을 말하고 있는 그에게, 대단한 인정을 하는 그에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합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도 하지 않았다. 옅은 미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런 그를 보기만 하였다. 마음이 차갑게 식었기 때문이다. 수업종료를 결정한 채로 오늘 나왔기 때문이다. 5월 29일 이른 아침, 그녀의 문학에 대한 동력, 한 달 동안의 새벽 노동을, 그가 무참하게 "4명의 수강생과 똑같다. 차별하지 않겠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라는 말로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은 11시. 오늘은 6월 3일 임시공휴일이다. 아마,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로 붐비리라. 아파트 근처에 있는 A커피숍은 공간이 넓고 인테리어는 현대적으로 세련되게 되어 있으며, 디저트와 음료가 크게 비싸지 않다. 가격 대비 맛도 괜찮아서 꽤 사람들이 많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가족들이 유원지에 소풍 오듯 놀러 나온다.


수업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가슴이 답답하고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졌다. 공황장애, 톱스타들이 말하는 공황장애가 이런 게 아닐까? 그녀는 일찍 나서기로 했다. 서둘렀다. 빨리 나가고 싶었다. 안절부절, 수업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박수가 빨라지는 자신을 돕고 싶었다. '이정아의 <그림 속 여자가 말하다>-여인의 초상화 속 숨겨진 이야기' 책부터 가방에 넣었다. 그녀를 안정시켜 주는 것은 책이다. 책은 그녀에게 명상과 위안, 격려, 힘을 준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안정제이다.


무엇을 입을까? 시원해 보이는 밝은 네이비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선택했다. 허리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리본으로 묶었다. 그리고 7개의 작은 별이 있는 14K목걸이를 착용했다. 원피스와 잘 어울려 보였다.


지난주 일요일에 머리 스타일을 조금 바꾸었다. 그의 '4명 수강생과 똑같다'라는 말을 들은 후, 바로 그다음 날 헤어숍에 예약을 했었다. 그녀는 변화가 필요했다. 머리끝을 조금 자르고, 새로운 펌 스타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훨씬 젊고 경쾌해 보였다. 부드러운 물결이 어깨와 허리 위 선까지 내려왔다.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꽤 시원해 보였다. 그리고 무척 밝아 보였다. 마음에 들었다. 됐다. 나가자!


그녀는 10시에 집에서 나왔다. 역시 집 밖으로 나오니 호흡이 안정되어진다. 한결 나았다. 6월 초인데 벌써부터 햇빛이 따갑다.


A커피숍까지는 도보로 10분이 채 안 된다. 양산과 선글라스로 무장하였지만 땀이 송글송글 났다. 잠깐 걸어왔는데도 무척 더웠다.


예상대로 벌써부터 커피숍에는 자리가 차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늘 앉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유가 어쨌든, 일찍 잘 온 것 같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그리고 그가 오기 전까지 그녀가 좋아하는 미술사 책을 읽기로 하였다. 예측대로 그녀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1시간 전, 아침 내내 그녀를 압박하였던 숨 막힘, 숨쉬기 힘듦은 사라졌다. 그녀는 원래의 평정심을 찾았다.


그와 수업을 한 이래, 처음으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르테미시아의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성모 마리아의 죽음', '세례 요한의 참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회화의 알레고리로서의 자화상' 그림을 감상하였다. 바로크 시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르테미시아의 광기 어린 삶. 그녀가 측은했었다. 한 시대에 맞선 아르테미시아의 용기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의 진정성에 대해서 생각에 잠겼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구축한, 자의식이 강했던 예술가. 그녀의 내면세계, 그것은 바로 그녀의 삶의 방향성이기도 했다. 독립적인 여자, 주체성이 강한 여자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여자. 그 여자는 바로 아트테미시아였다.



대개 그는 수업 시작쯤에 온다. 그녀는 그가 오기 10분 전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준비하였다. 그가 도착하여서 바로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시간 계산을 하면서 주문을 하곤 했었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였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 그녀는 뚫어지게 몰입하였다. 그녀의 맑은 눈, 영롱해 보이는 안광이 빛나는 눈, 눈가의 음영, 오똑한 콧날, 코면의 음영, 이슬을 머금은 듯한 장밋빛 같은 입술, 인중의 음영, 오른쪽 뺨의 음영, 두건의 신비로운 푸른빛, 입술을 살짝 벌리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 흑백의 배경색 등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분석하면서 한참을 감상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 그가 왔다.


자리에 앉기 전, 등에 맨 배낭을 내려놓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아주 초췌했다. 평소의 깨끗한 맑은 피부가 아니었다. 오른쪽 눈 옆에는 중간 크기의 종기까지 나 있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리라. 어젯밤, 그녀는 6월 수업료를 이체하지 않았다. 수업 하루 전에는 그녀는 수업료를 이체한다. 수업 시작 전, 수업료를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예정된 수업시간이었다. 그녀는 그의 말과 행동을 보고 수업 결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왔다. 마음은 수업종료 100%까지 되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마지막으로 해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오늘 오전 11시, 미술 수업 1시간, 예정대로 그녀는 나왔고, 그도 나왔다.


그의 초췌함.

잠 못 듦.

내색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 그녀는 어느 날부터는 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인사 또는 안부라도 묻지 않았다. 괜한 오해,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싶지가 않았다.

4월 말, 마지막 주, 수업 : 그와의 첫 스몰토크하는 예정된 날, 그날, 그녀는 그에게 영어로 인터뷰하는 수업을 준비해 갖고 갔었다. 그에 대한 궁금증. 그녀는 질문지를 만들어 갔었다. 그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특히, 그의 꿈은 무엇인가? 그는 앞으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 영국 유학 전후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꽤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는 아주 진지하게 답변을 했었는데, 꽤 길게 구체적으로 답변을 했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까지 정중하게 했었다.


그리고


그날, 그가, 여자 친구에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고 놀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나 보겠다는 둥, 서로 조심하면 되죠. 이상하고도 기이한 말들을 했었다. 그 이후의 수업에서는, 수업 도중에 갑자기 "플러팅 했어요?" 질문까지 했었다. 그렇게 물은 이후로, 그녀는 최대한 그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가 오해나 착각을 하게 될까 봐. 지레 겁부터 나서. 그녀를 자꾸만 오해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그녀는 그 앞에서 자꾸만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었다.





그녀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감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퍽 놀라는 듯했다. 물론 그녀가 책을 갖고 와서 읽고 있는 것을 안다. 그가 오면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을 덮고 그녀의 옆 자리에 가만히 두는 것도 보았고, 책을 가방에 넣는 것도 그는 보았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 그가 커피숍에 들어와서 그가 그녀 앞에 오기까지 그녀가 모른 채로 그림에 몰입하고 있는 장면은 처음 보았다. 그녀가 미술사 공부를 했었고,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장면은 처음 본 것이다.


그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처음 수업 시작했을 때에는 그녀의 맞은편, 대각선 방향으로 앉았었다. 한 달이 다 되었을 때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어느 날 앉았다. 그가 감기에 심하게 걸려서 수업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을 때, 아프면 다음에 수업하자고 하였지만 그는 이런 적은 없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그날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그녀의 앞,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날부터 그는 대각선 방향으로 앉지는 않았다.


그날, 그가 수업을 마치고 나가기 전, 그녀에게 "나는 남자가 아니야, 나는 남자로 안 보여?" 그런 말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였던 것이다.


"좀 일찍 왔어요. 1시간 일찍요. 공휴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오거든요."

그와 그녀는 커피숍에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찬 장면을 둘러보았다. 아빠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테이블 위에 달달한 디저트와 시원한 색깔이 고운 음료를 주문하고 함께 레고를 하고 있는 장면까지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눈을 찡긋 하면서 얼굴 가득, 미소로 '그렇구나'라는 대답을 한다. 그의 미소, 그의 얼굴 가득한 소리 내지 않는 웃음, 은근한, 살짝, 보기가 좋은 미소. 미소년의 장난기가 섞인, 그의 미소. 그의 미소는 늙지 않았다. 아저씨 같지 않았다. 나는 그의 미소를 좋아했었다. 그런 미소는 흔치 않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낯선 그의 나이 든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는 그의 나이보다는 10살 정도는 어려 보인다. 풋풋하게 젊어 보일 때가 더 많았다. 애교머리 때문인가?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41살, 나이로 보였다. 중년이 시작되는 나이, 그 나이에 어울리는 듯한 나이 듦이 보였다. 그녀 생각에는 잠을 못 자서 그런 것 같았다.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뭔가 고심이 서린 얼굴빛이었다.


"책 한 번 보자."

그녀는 난감했다. 그 책 속에는 보이고 싶지 않은, 그가 오해하면 어떡하지, 그런 그림들도 꽤 많았다.

"작년에 현대미술사 공부할 때, 작가님이 누드화를 많이 준비해 왔어요. 여리하고 코스모스 같은 수줍음이 많은 작가인데요. 넓은 스크린으로 누드화를 2시간 동안 아주 많이 봤어요. 그때 수강생이 한 7명쯤 있었는데, 그중 나이가 제일 많으신 분은, 오늘 신기한 걸 봤다! 그러시면서 친구한테 자랑하듯 전화까지 할 거라고 했어요. (그녀는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괜히 민망해서, 미리 그에게 연막을 깔아야 했다.) 그날 그렇게 누드화를 공부한 이후부터는 누드화를 보는 게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날 많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상한 작품들이 꽤 많았거든요.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한참 설명을 많이 했다. 설명을 다 들은 그는, 손까지 내밀었다.

"책 한 번 보자."


그녀는 마지못해

"뭐, 미대 나왔으니까."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바로 옆 자리에 있는 책을 그에게 건넸다. 그가 펼쳤다. 한 번에 펼친, 그림이!


아뿔싸! 하필이면, 많고 많은 그림 중에 제일 보지 않길 바란 그 그림이었다.


두 여자의 상반신 누드 그림!

한 여자가 옆의 다른 여자의 유두를 왼손의 엄지와 중지로 살짝 꼬집는 듯한 장면의 그림을!

하필이면!

너무나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문가니까.


아, 아, 어떡하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몰입하여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나를 오해하면 어떡하지. 이건 그림인데. 유명한 명화.


- '젖꼭지에 담긴 기묘한 이야기' -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 퐁텐블로 파가 그린 그림, 그 그림을 그는 뚫어지게 보았다. 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목욕하는 가브리엘 데스트레'그림도 보았다.


그다음에 펼친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의 초상화였다. 그녀의 청순하면서도 초롱초롱 영민한 눈, 오똑한 코, 다부진 가느다란 입술, 그가 가르쳐 준 쌍꺼풀 위의 음영들, 코의 음영들, 입술 주변의 음영들, 뺨을 입체감 있게 표현하는 음영들, 그가 가르쳐준 음영들을 그녀는 상기하면서 감상했었다. 그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본 그 그림을, 그가 지금 보고 있다. 아마, 그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녀는 평소에 이런 대가들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구나.


"나는 그림을 아주 좋아해.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다가 차까지 놓친 적도 있어. 일행들은 다 갔는데도 나는 전시회 끝까지 있다가 차를 놓쳤지. 어떤 그림은 1시간 동안 본 적도 있었어. 그림의 농도, 터치, 물감을 덕지덕지 바른 그 밀착감,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 당시에 화가의 의도도 생각해 보고, 또, 초상화 속의 인물, 모델이 보는 시선, 각도, 그런 것들을 유심히 봐, 화가는 어떤 의도로 그런 포즈를 취하게 연출했을까? 그리고 이 책을 쓴 이정아의 시선, 관점도 생각해 보고, 나는 어떤 시선으로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지. 그래서 미술사 책은 아주 아주 오래 보게 돼. 시간이 많이 걸려."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곰곰이 생각하면서 듣던 그는, 귀신을 본 것 같은 얼어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당신은 예술가구나!"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내재된."


아, 그날, 그의 얼굴, 그리고 그의 말은 도장처럼 뇌리에 찍혀 있다. 한 장의 스냅사진이 되어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 그에게 빚을 진 것 같은 기분, 그녀를 알아봐 준 그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 그것이 후폭풍으로 몰려와 그녀를 내내 괴롭혔다.



아직 뭔가를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그는 그녀를 알아봐 줬다. 그것이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인정머리 없는 방식으로 그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서, 그에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는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았었다.



본 수업이 들어가기 전에 그날은 그렇게 인사 시간이 길었다.





그가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에 현대적인 느낌의, 단순한 여자들의 이미지가 보였다. 오피스룩 복장을 한 여자의 이미지. 라운드 티셔츠를 이너로 입고 재킷과 스커트 복장을 한, 적당한 크기의 가방을 멘 여자의 이미지들.

"그림이 어렵다고 하니까(제임스 티소의 보트를 탄 젊은 여인), 이렇게 준비해 봤어. 이건 쉬울 거야."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설명을 했다.

다음 그림은 커피숍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이미지였다.

"이렇게 되는 거야. 여행스케치. 일단은 한 사람씩, 이미지 연습을 한 후에, 나중에는 이렇게 되는 거야. 개인전을 할 수도 있고."

그녀는 가만히 설명을 들었다.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애간장이 타는 듯했다.

"왜, 나한테 보낸 그 글들 있잖아. 그 글들 이미지를 생각해서 그려봐도 좋고."

그의 제안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가 꺼낸 말들하고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 어, 그가, 내가 그에게 보낸 글들을 인정을 하네. 내가 보낸 그 이른 아침의 일기 내용이 문제가 되어서 내게 '4명의 수강생과 똑같다. 차별하지 않겠다. 그건 공평하지가 않다'는 말로 나를 부정한 그가, 지금 그가, 내게 '나한테 보낸 그 글들 있잖아. 그 글들로 이미지를 생각하여서 그림을 그리자고 제안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

굉장한 제안에도 시무룩했다. 기쁘지가 않았다.


뭐지? 왜 갑자기 그의 공적인 장치가 사라지는 거지? 그렇게 단호하게 그녀를 꾸중하듯, 가르치듯 말했던 그의 사회적인 장치가 왜 지금,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거지?


"난, 재미가 없어졌어. 호기심이 없어졌어. 하고 싶지가 않아. 더 이상은. 관심이 없어졌어. 그림에 대한 나의 러브가 없어졌어. 난, 러브가 중요해."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그는 힘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위해 애써 열심히 생각해서 준비해 왔고, 또 그의 제안은 그의 신념을(?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너뜨리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동도 없다.


그는 단념하는 듯했다. 어깨가 처졌다.

"그래? 알았어. 그럼, 한 달만 쉬자. 이제 9회 차 시작인데, 음, 한 달 쉬고 나서 생각해 보자."

그는 한 달 뒤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한 달 쉬고 나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지."



미술 수업에 대한 그들의 조율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오늘 수업료는 안 내도 돼. 하기 싫은 수업을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거니깐."


- 그녀는 이 날 1회 차 미술 수업료를 이체해주고 싶었지만, 돈으로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그의 말대로 넘어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윽고,

그녀는 준비한 그녀의 카드를 내밀었다.

"난,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문학과 예술의 만남.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았어.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 같아. 나이를 서로 묻지는 않았어. 그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야 벽이 없어질 것 같았어. 그는 작사와 작곡도 하고 시도 써. 방송댄스를 하는 사람인데. 이야기를 해보니까. 나랑 통해.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 선생님은 안 된다고 했잖아. 차별할 수가 없다. 그랬잖아."


어깨가 축 처져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는 불현듯! 아니, 고심하고 결심을 굳히고 나온 듯,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불쑥! (내 입장에는 그랬다.)


"나랑, 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정말 바로, 단 1초도 생각해보지 않고, 진짜, 바로! 단호하게, 약간의 표독한 소리로,

"뭘, 1주일에 2번씩이나 만나. 1번만 보면 되지. 맨날 다른 사람을 봐야, 새롭지."

그의 상반신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뭘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터지는, 갈라지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 그리고 잇따른 그 말의 내용들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같은 사람도 매일은 다르지."

그 말을 하면서 뭔가를 더 설명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삼키는 듯했다. 그녀를 더 설득하고 싶은, 그녀를 더 설득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지만 그는 참는 듯했다. 그가 뱉은 '4명의 수강생과 똑같다'는 그 말을 기억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의 차가운 마음, 차가운 말의 의미를, 그녀가 왜 저런 말들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에는 짜증도, 화남도, 속상함도 없었다. 오직 무력감만 보였다.


"나는 필요해.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나랑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통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해."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문학을 하지 못해서 내 이 가슴에 지금,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그녀의 표정, 그녀의 말, 그녀의 온 마음을 그는 진심을 다해 듣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얼어붙은 듯했다.


"알아."



"알아'라는 그 말의 무게감,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의 "나랑, 하자"라는 말의 용기,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그의 다정함, 그의 속 깊음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안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





그가 어떤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여서,

미술 수업을 준비한 것을, 그때는 왜 알아주지 못했을까?


6월의 미술 수업은 한 달로 유보하였다. 이번에는 영어 수업도 그에게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꼭, 꼬집어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녀의 부족한 기초문법을 이야기하면서 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언질을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만큼은 그가 큰 소리로 부르짖듯이 말을 했다.


"그렇게 하면 안 돼! 과목이 다르면 여러 선생님을 두는 게 맞지만, 영어는 그렇게 하면 안 돼. 한 사람으로 가야 돼. 여러 사람을 하면 안 돼. 같은 과목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고 쉽지가 않았다. 그는 4명의 수강생이 있잖아. 나도 여러 선생님을 두는 거야. 그것도 남자 선생님으로. 영어 과목에 몇 명의 선생님을 두고, 남자도 그 말고, 두는 거야. 그럼 그와 나는 공평해지는 거야. 그가 말한 것처럼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 그에게 과시?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얼마든지 당신처럼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과외 선생님은 누구나 똑같다고.


그의 얼굴에는 그리고 온몸에는 무척이나 깜짝 놀라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녀를 어떻게 제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의 말을 들을 것인가? 그런 표정이었다. 아무리 설득을 하여도, 그녀는 돌이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단념했다. 그의 어깨는 점점 처져갔다. 온몸에 힘이 풀린 듯해 보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기초는 다른 사람하고 하고, 이거는 나하고 해."


그리고 그는, 뭔가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당신도 글쓰기를 가르칠 때 그렇잖아. 어느 정도 되면, 그때 올라간다고."

그리고 연이어서,

"속단하지 마, 속단하지 마, 나도 생각이란 걸 하고 있어. 나도 생각을 하고 있어."

그는 그녀의 뇌리에, 마음에 새김질을 하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의 애절한 간청, 애절한 요청, 그러나 그마저도 그녀는 외면했다.


왜? 바로 얼마 전, 며칠 전에는, 4명의 수강생과 똑같다고 했는데, 지금은, 왜, 그가 나를 이토록 간절히 원한단 말인가. 그의 바뀐 태도, 그의 말, 행동이, 그의 진심이 그녀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가 얼마나 간절히 그녀를 지키고 싶어 했는지를, 그가 얼마나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는지를, 그가 영어 수업을 지키려고 한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아침 10시에 나와도 이렇게 더운데, 오후 2시는 좀 그래. 영어도 좀."

어정쩡, 우물쭈물해하는 그녀, 그는 바로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 양산 쓰고 내려오면 되지."

그 말에 그녀는 다른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뭐, 양산 쓰고 내려오면 되지."

그 말에 그녀는 기뻤다. 그가 '4명 수강생과 똑같다.' 그 말을 했을 때 - 그녀를 이제는 귀찮아 하는 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서, 그녀는 기뻤다. 그 말이 그녀를 하루종일 따라다녔다. 나풀나풀~~ 뛰어다녔다. 그날은 그랬다.





문득, 그날이 생각난다.


"나는 예전에 김연아를 많이 그렸어요. 그런데 이모가 이 녀석! 색기 있는 여자를 좋아하네. 하면서 혼내시더라고요."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색기 있는 여자, 그 말 자체가 왠지 낯설고 부끄러웠다. 수업 시작 전, 차를 앞에 두고 인사 정도 하는 수업 도입부에 그가 꺼낸 말이 왠지 도발적인 것 같아서. 그는 맞은편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응시하지 않았다. 앞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듣기만 하고 반응이 없자, 그가 재촉한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엉?"

그가 그녀의 반응을 기대한다.

"김연아는 자기 길을 간 여자예요. 난 그래서 그녀를 좋아해요."

그녀의 대답을 들은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가 아침 수업 전, 왜 뜬금없이 갑자기, 그런 말을 했을까요? 지금은 궁금합니다.

그는 색기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 말인가요? 아니면 내가 그렇게 그에게 보였다는 말인가요?





미술 수업은 한 달을 쉬기로 서로 조율하였다.

"한 달 쉬고 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그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녀는 그 말이 미덥지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그림이 좋아지고 있다면서 더 배워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림 배우는 게 싫어졌다. 그녀의 남편 또한 그녀가 그림 배우는 것을 포기하는 의사를 보였을 때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었다.


영어 수업으로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불쑥 자신의 생각을 전하였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감정 겨누기를 하고 있어서 마음이 부대꼈다.

"사실, 나는 그리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녀는 좀 뺐다. 그녀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자 그가 말하라는, 따뜻한 눈빛을 보낸다.

"나는, 나를 그리고 싶어. 내 모습을 그리고 싶어."

그녀는 집에서 나오기 전에 준비해 놓은 그녀의 여행 사진을 보여주었다. 슬리브리스 데님 A라인 미디 원피스에 빨간색 쁘띠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목 중간에 리본을 매서 꼭, 목걸이를 한 것처럼 포인트를 주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밤 조명에 어슴푸레한 배경. 그리고 치마 자락을 살짝 잡고 몸은 살짝 돌리는 찰나의 사진, 눈은 남편을, 입은 행복한 미소로 - 달콤한 사랑스러운 귀여운 장면이었다.


그 포즈로 되기까지의 몇 장의 컷 사진을 그는 손가락을 올려서 확대하면서 이게, 좋네, 아, 아니, 이게 더 낫다. 역시, 내가 생각해 둔 그 장면의 사진을 그도 제일 좋다고 하면서,

"예쁜 옷 입고 갔네."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의상 칭찬을 했다.


"지금 내 카톡으로 보내. 여기에서 화면에 올리고 그리면 되지."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내 카톡으로 보내. 아, 아냐."

그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주고 싶어 했다. 수업 외의 시간, 그가 말한 수업 외의 시간은 안 된다고 한 그가 자신의 시간을 빼서 그려주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했었던 말이 생각났나 보다. 바로 금방, 아, 아냐. 그의 표정에서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관찰자로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내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걸 알게 되었어. 집에서 그릴 거야. 유화로. 집에서 그리면 미술 학원에서 맡아서 역겨웠던 그런 냄새로 힘들지는 않을 거야."

"평상시의 모습과는 다른, 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울 때가 있구나.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어."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어떤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를 관찰자로 보는 것 같았다. 그녀처럼. 아니면 무력감에 힘이 들어서 가만히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어떤 제안도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에, 그는 아마 힘이 풀린 것 같았다. 그녀는 또 다른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하얀 슬리브리스 니트 미디 원피스를 입고,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해 아이보리색 긴소매의 블라우스를 원피스 위에 입은 모습, 그리고 올림머리를 하고, 얼굴이 덮일 만큼의 큰 캣츠형 브라운 선글라스를 한 그녀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의 낮은 담벼락에 앉아서, 신발을 벗고 그 신발 위에 맨발을 얹은 채로, 두 손은 양 옆으로 얼굴에 손을 살짝 올려서 찍은 오후의 한 때, 한 순간의 평화로운 그녀의 모습의 사진, 그가 손가락으로 확대해서 보고 있다.

"이렇게 쉬고 있는 내 모습도 그리고 싶고."

그가 고개를 올려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얼굴 빨개졌다!"

"왜? 얼굴이 빨개져?"


그녀는 몹시 부끄러웠다. 자신의 얼굴이 빨개져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처음 놀린 그때처럼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는 그녀를 놀렸다.

그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여자친구한테, 그 말은 뺐구나. 그때는 "여자친구한테 뭐 하나 가르쳐주면 얼굴 빨개지듯이 빨개졌다." 그랬는데. 저렇게 말하면 또 첫 시작처럼 되는가. 다시 시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그때처럼 그에게 다시 호기심과 관심, 흥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제일 처음으로 그녀에게 장난친 말, 그 말을 이번에 또 하는구나. 그럼, 이렇게 다시 새로운 한 챕터가 시작되는 건가?



그때는 몰랐다. 그의 장난, 그의 장난기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자신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표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를, 그때는 몰랐다.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고 애썼는지를.


그는 유머가 있는 사람이었다. 가벼운 장난, 그것은 진심을 포장한 다른 언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어, 벌써 12시 30분이에요. ○○동에서 2시에 수업 있다고 했잖아요."

"아! 맞다."


그는 노트북 화면 가운데에서 12시 30분이라는 시간을 보고 놀란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배낭을 어깨에 메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왜 내게 유학 간다는 말을 안 했냐?"

따지듯이 물었다.

"부끄러워서."

"뭐가, 부끄러운데."

마지막까지 그는 못다 한 질문을 했다.


그들만의 언어, 존댓말을 섞어가면서 반말로 친근하게 대화하는 그들만의 언어, 세계, 미묘하다. 왜 그 앞에서는 나의 언어가 달라지나? 어떤 누구 하고도 대화할 때 나오지 않는 말투다. 연습을 해도 되지 않을 언어다. 어떻게 그 앞에서만 나의 언어가 이렇게까지 친숙한 톤, 말투, 이런 억양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내 목소리를 내가 들어도 웃긴다. 달달하게, 귀여운 듯이, 어쭈주 하듯이 나오는 그런 말투,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지. 어떤 누구의 앞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그런 말투, 그것이야말로 신선했다. 그녀 자신을 분석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그녀는 25살 이전의 청춘으로 돌아가 있는 듯하다. 그와 있을 동안에는 그녀는 진정 그녀가 만든 나이 37살인 것이다. 그는 오빠인 것이다. 41살. 맞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가 오빠인 것이 분명하다. 그와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것을 잊는다. 생각할 틈이 없다. 아마, 그가 41살, 이라서 그런가? 세상물정을 아는 나이라서 그런가. 결코 설익은 나이가 아니라서 그런가? 알 수가 없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압박감, 그러나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는 편안함, 알 수가 없다.


"나는, 책 좀 더 보고 갈게요. 아직 집에 에어컨 안 켰어요. 집은 너무 더워서요."

그들은 수업이 끝나면 늘 함께 나가서 커피숍 앞에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배웅해 줄게요."

"아, 아니, 그냥, 앉아 있어."

그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그녀를 챙겼다.

"아니, 난, 화장실 가려고요."

그렇게 둘은 함께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는 커피숍 입구로 - 오른쪽으로, 그녀는 화장실로 - 왼쪽으로 그렇게 둘은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걸어가면서 그녀를 돌아보며 "아, 아니, 그냥, 앉아 있어."라고 만류하던 그의 옆얼굴. 그 얼굴만이 그녀에게 남았다. 아마, 그는 그녀를 다시는 볼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또한 그때는 그랬다. 금요일에 6월, 영어 첫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종료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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