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ympus PEN EE-S

천연색인데 흑백사진 같았다

by 박물지 선생

천연색인데 흑백사진 같았다

그 골목은 칙칙하다. 오래된 적산가옥, 좁은 뒷골목, 빛도 잘 안 드는 낡은 상점들. 주로 남자들이 드나드는 그런 곳이다. 나는 그날도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놀러 간 날이었다. 노인이 된 사장님들과 배달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 골목에만 마호병을 들고 와서 다방커피를 타주고 가시는 아주머니가 계신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온통 하얀 분이었다. 머리도, 피부도, 옷도, 심지어 카메라를 싸 오신 가방도. 그 칙칙한 골목에 조그맣고 꼬부라진 하얀 할머니가 들어오시니 금방 눈에 띄었다. 사진을 찍어놨으면 천연색인데도 흑백사진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곱디곱게 스카프인지 손수건인지로 꼭꼭 싸 오신 카메라를 조심스레 카메라 가게 주인장에게 내놓으셨다. 일본에서 평생을 보내신 교포 할머니였다. 아흔을 앞두고 카메라를 팔러 청계천 카메라 골목까지 오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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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은 난감해하셨다. 큰소리로 "이거는요, 좋은 건데 지금 안 팔려요. 노출도 안 되고 셔터도 안 되고, 수리하면 팔 수가 없어요. 그냥 가지고 가세요."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시는 것 같았다. 반은 알아들으셨을까. 그러면서도 카메라를 쓰다듬으며 계속 좋은 거라고 하셨다. 무지 비싸고 좋은 카메라라고.


나는 좁은 상점 문간으로 비켜나 어슬렁거리며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듯이. 묻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사셨지 싶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을까. 왜 파시려는 걸까. 유품일까. 손주 용돈일까. 행색으로는 쪼들려 보이지 않으셨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했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3, 40분의 시간이 흘렀다.


내가 사장님한테 말했다. "제가 사서 제가 고쳐 쓸게요."


사실 큰돈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돈을 많이 받으시는 것보다 팔아야겠다는 쪽이셨다. 빈손으로 그 카메라를 다시 가지고 가시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할머니도 생각났다. 카메라를 건네받고는 민망해하실까봐 내가 먼저 자리를 떴다. "건강하세요" 하고.



손에 받아든 Olympus PEN EE-S는 셔터가 붙어 있었다. 전후 물자가 모자라던 시절, 필름 한 롤로 72장을 찍을 수 있게 만든 하프 프레임(half-frame) 카메라. 작고 납작하고 가벼웠다. 조심스레 셔터를 눌러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셀렌은 살아 움직이는데 셔터막이 떨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햇빛과 어두운 실내를 번갈아가며 움직여 봤다. 그러다 — 셔터가 움직였다. 주인 할머니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긴 잠에서 깨어난 걸까.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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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us PEN EE-S | 1962 | Japan

LENS: D.Zuiko 30mm f/2.8

FILM: 35mm half-frame (18×24mm / 72 exposures per roll)

NOTE: Selenium metered, battery-free auto exposure. Red tongue warning system.

FROM: 청계천 예지동 카메라 골목, 서울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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