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구조 작전

PART Ⅳ. 삶의 난제: 아빠의 방정식

by 연우

근무를 마치고 회사 건물에서 나오자,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 들려? 내 물음에 직장 동료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의 정체는 금세 드러났다. 사무실 건물 뒤편 아스팔트 공터 한가운데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헤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양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한쪽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고, 며칠을 굶었는지 살가죽 아래로 뼈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공터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기어가는 연약한 생물이 걱정스러웠다. 너무 작아서, 누군가 차를 몰고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순간 끔찍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직장 동료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사무실로 달려갔고, 두유, 종이컵, 유성펜, 자리에 걸어두었던 니트 카디건 그리고 폐지로 내놓으려던 종이 상자를 챙겨 곧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고양이와 직장 동료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종이컵에 두유를 따르자 고양이는 코끝을 갖다 댔다. 핑크빛 혀로 조금 핥아먹더니 이내 다시 가늘게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자그마한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낯선 손길에 놀랐는지 고양이는 더 날카로운 소리로 울어댔다. 부드러운 카디건으로 몸을 감싸주었다. 한참을 울다가 고양이는 어느 순간 스르르 잠들었다.


쭈그리고 앉아 상자에 유성펜으로 ‘새끼 길고양이가 안에 있어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상자를 차가 다니지 않는 건물 입구에 조심스레 놓았다. 자치구 동물 보호소에 전화를 걸었지만, 수화기 너머로는 저녁 시간대라 신고 접수는 따로 받을 수 없으며, 어미 고양이가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 지켜보라는 무심한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새끼 고양이는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마치 지면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건물 경비 아저씨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어미 고양이가 부디 돌아와 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아침, 고양이와 상자는 통째로 사라진 채였다.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봤지만, 아저씨도 “상자랑 고양이는 봤었어요”라고 할 뿐이었다. 그날은 일하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두 손안에 쏙 들어오는 앙상하고 작은 체구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미약한 울음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어미 고양이가 찾아왔을 수도 있어. 어쩌면 누군가가 데리고 갔을 수도 있잖아. 아니면 보호소에서 확인하러 왔으려나? 내 손을 떠난 일이야. 애초에 내가 키우던 고양이도 아닌데.


길고양이를 봐도 이렇게까지 걱정한 적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퇴근할 때까지 업무와 걱정 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그렇게 흘려보내다, 문득 오래된 기억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나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빌라에 살았다. 뒷산이 가까워 공기가 참 좋았다.


아빠는 아침에 자고 밤에 일해, 밤에는 늘 불을 켜놓았다. 당시 서재의 창문은 요즘 알루미늄 샷시 창문과는 다르게, 방충망도 없이 나무로 된 홑창이었다. 그래서 밤에 불을 켜고 창문을 잠깐이라도 열어놓으면, 온갖 벌레들이 서재로 몰려들었다. 깨소금만 한 날벌레부터, 가끔은 손바닥만 한 나방까지 날아들었다. 책장 맞은편 벽에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마치 곤충 표본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벌레 공포증이 심했던 엄마는 벌레가 나타날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기어 다니는 벌레는 그나마 괜찮았다. 잡기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어디서 들어온 지도 모를, 손바닥보다도 더 큰 괴이한 무늬의 나방이 부엌과 거실을 가로질러 날아다니면, 엄마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엄마가 여보, 여보! 벌레! 빨리! 라고 소리 지르며 거실을 휘저으면 엎드려 있던 아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신문지를 둘둘 말아 박스 테이프로 단단히 감싸고 양면테이프를 덧대면 일종의 몽둥이 끈끈이가 탄생했다. 그 작업에 엄마는 더 난리를 쳤다. “그거 만들다가 벌레가 숨어버리잖아!” 하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는 몽둥이 끈끈이에 나방을 어떻게든 붙인 뒤, 창문 밖에 톡톡 털어 방생시켰다. 엄마가 옆에서 “죽여, 죽여버려!” 하고 외치면 아빠는 “살릴 수 있는데 왜 죽여?” 라며, 나방의 몸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다뤘다. 엄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식은땀에 젖어 실신할 듯 기진맥진하는 동안에도 아빠는 나방의 몸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데만 집중했다. 구조 작업을 끝마친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화 대사를 읊듯이 말했다.


“날아다니는 놈은 기어 다니는 놈보다 확실히 까다롭군.”


몽둥이 끈끈이는 완벽한 도구는 아니었다. 기어 다니는 벌레는 손상 없이 떼어낼 수 있었지만 날개 달린 벌레는 그렇지 않았다. 자칫 각도나 힘 조절을 잘못하면 끈끈이로 인해 날개가 손상되기 쉬웠다. 아빠는 벌레의 날개가 상했을 때는 탄식을 내뱉으면서 벌레를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기도 했다.


어린 내가 물었다.


“그냥 몽둥이로 찌부시키면 되잖아. 왜 붙여서 밖에다 버려?”


아빠는 짧게 대답했다.


“가엾잖아.”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보고 자란 나는 엄마로부터는 벌레 공포증을, 아빠로부터는 벌레 연민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벌레를 싫어하다 못해 공포마저 느끼면서도 막상 죽이지는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화장실에서도 하루살이를 보면 손으로 훠이훠이 쫓는다. 샤워기 물줄기에 그 생이 부서질까 봐서다. 물 몇 방울에도 생을 마치는 작은 존재가 며칠을 더 살아보겠다고 이리도 날갯짓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습한 날에는 가끔 쥐며느리가 어디선가 나타난다. 그럴 때면 온몸에서 땀이 나고 질겁하면서도 종이컵으로 조심스럽게 덮어 둔다. 모기도 안 잡는다. 허벅지 위에서 피를 빠는 모기를 보면 손으로 내치기만 할 뿐이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다리가 너무 많거나 몸통이 손바닥만 한 벌레를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막상 죽이려 하면 또 머뭇거린다. 두려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엔 그 생명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지켜본다.


아빠가 벌레를 구조하던 날과 내가 길고양이를 챙기던 날, 그 사이에는 25년이라는 시간의 강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 속에는 같은 마음이 깃들어 있다.


모든 생명은 자기 여정을 끝까지 완주할 권리가 있다는 것.

몸체의 크기는 다를지언정, 그 생을 바라보는 연민의 크기는 같다는 것.


몽둥이 끈끈이는 어딘가 괴상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아빠가 그만의 신념으로 만든 멋진 발명품이기도 하다. 아빠의 벌레 구조 작전을 통해 배운 생에 대한 연민, 그것은 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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