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Ⅴ. 시간의 흔적: 사라짐과 남겨짐 사이에서
아빠가 아프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아빠가 모처럼 외출한 날이었다. 인터뷰든 뭐든 늘 집에서 해결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만큼은 사정이 있어 카페에서 미팅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어딘가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내가 일이 잘 안 풀렸냐고 물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너, 커피 주문하면 진동 울리는 기계 받는 거 알고 있었냐?”
“그게 생긴 지가 언젠데.”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상대방보다 먼저 도착했던 아빠가 주문과 계산을 마치자, 점원이 동그랗고 납작한, UFO처럼 생긴 물건을 건네주더란다. 무엇인지 묻기엔 민망해서 그냥 자리로 돌아왔고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만지작거렸다고 했다. 갑자기 울려대는 진동에 깜짝 놀라 계산대로 갔더니 진동벨을 가져가고는 커피를 주더란다. 아빠가 진동벨의 정체를 알게 된 정황이었다. 일도 집에서 하고 친구들도 집으로만 부르는 은둔자 아빠에게 바깥세상은 얼마나 신기한 곳일까, 싶었다. 하지만 아빠가 아프고 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는 아빠가 혼자 바깥에서 밥 한 끼도 사 먹지 못할 것 같다고. 그것은 아빠가 예전처럼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고. 아빠가 정말로 늙었기 때문이라고. 시간은 아빠보다 빠르게 흘러가며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엄마 생일을 며칠 앞두고 내가 집에 들른 어느 날, 아빠는 유난히 반가워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에게 다가오던 도중 아빠의 눈이 갑자기 감겼다. 나무토막처럼 빳빳해진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릿하게 잔상을 남겨, 찰나의 순간임에도 무슨 일인지 바로 감지할 수 없었다.
아빠의 몸이 바닥과 부딪히는 퍽, 하는 둔탁한 소리에 엄마와 나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무작정 아빠를 흔들며 이름을 불러댔다.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마치 오랜 깊은 잠에서 갓 깨어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쓰러지면서 의자 등받이 모서리에 턱을 찧었는지 턱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창고나 연고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처였다. 백혈병 환자에게는 위험할 수도 있어 결국 그날 밤 우리는 응급실로 향했다. 꿰매고, 소독하고, 약을 처방받고 돌아오던 새벽, 나는 죽음에는 예고편이란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아빠에게 찾아온 ‘늙음’의 흔적들을 더욱 민감하게 알아채기 시작했다.
어느 봄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가 씩씩대며 신발을 벗으며 숨도 고르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왜 어르신이냐!”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물 한 병을 사는 아빠에게 “안녕히 가세요, 어르신”이라고 인사한 직원이 발단이었다. 그날은 아빠가 ‘어르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생애 최초의 날이었다. 아빠는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앙상한 팔다리, 구부정하게 굽은 어깨의 아빠는 내가 봐도 ‘어르신’ 같았다.
세월은 아빠의 저항과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하루는 아빠가 집 근처 뒷산을 산책하던 날이었다. 그곳은 경사가 완만하고 나무 그늘이 적당해 노인에게도 좋은 산책 코스였다. 평소처럼 걷던 아빠에게, 한 여학생이 다가와 아빠에게 지하철역 방향을 물었다. 아빠가 손가락으로 오른쪽을 가리키자, 여학생은 초행길이라 어려웠는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가려던 길이니 함께 걷자는 아빠에게, 학생은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라고.
아빠는 이 일화를 몇 번이고 회상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편의점에서 어르신이라는 말에 씩씩댔던 사람이 이제는 할아버지라는 호칭에도 담담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아빠에게 남긴 흔적은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었다. 외양과 호칭을 넘어 내면과 익숙했던 일상까지 서서히 바꿔놓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액션이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스릴러와 호러 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즐겨 보았다. 엄마랑 내가 무서운 장면을 손가락 사이로 볼 때면 아빠는 어차피 영화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호릴러(호러+스릴러)’ 같은 단어를 만들어 낄낄대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는 이제 예전처럼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나 호스텔 같은 무서운 영화를 더는 볼 수 없다며, 이제 자신이 ‘진짜 할아버지’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공포 영화를 보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고, 오싹한 기분을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간은 그렇게 아빠의 건강과 외모는 물론 생각과 취향까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바꿔나갔다.
가끔은 키오스크 앞에서 길을 잃은 듯한 표정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이제 우리 아빠도 저렇겠지, 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아빠의 얼굴은 더욱 깊은 주름으로 패고, 머리는 더 새하얘질 것이다. 안 그래도 굽은 허리는 더욱 굽고 기울어진 어깨는 더 처질 것이다. 시야가 흐려지고, 말은 어눌해지며, 세상의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내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빠는 그렇게 노인의 정형화된 모습에 가까워지고 결국 죽음의 얼굴을 닮아 갈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아빠를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모두가 아빠를 할아버지로 보아도, 심지어 아빠가 자신을 할아버지라 여겨도, 나에게 아빠는 아빠일 뿐이다. 시간이 건강을, 외모를, 취향을 심지어 아빠라는 사람 자체를 바꿔놓을지라도 내게 아빠는, 늘 아빠로 기억될 것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