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의 기울기

PART Ⅴ. 시간의 흔적: 사라짐과 남겨짐 사이에서

by 연우

아빠는 바깥 활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친할아버지는 등산을 유독 좋아했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높은 산들을 정복하는 것을 즐거운 소일거리로 삼았다. 친할아버지댁에 놀러 가면, 정상에서 찍은 사진들이 점점 늘어나 있는 것을 보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허리가 곧았고, 늘 바르게 펴고 다녔다.


세월이 흐르면서 명절마다 우리 집에 오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우리 집은 큰집이라 매년 명절이면 할아버지와 친가 식구들이 모이곤 했다.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해가 갈수록 할아버지의 허리는 조금씩 둥글게 굽어갔다. 아빠는 “할아버지 허리가 굽은 건 등산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야. 산을 너무 오래 다니면 허리가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빠는 등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가 왠지 기이하게 느껴졌다. 분명 내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의 허리는 살짝 기운 정도였는데, 어느 명절에 우리 집에 오셨을 때는 거의 90도에 가까울 만큼 굽어 있었다. 두 명의 보조자가 양팔을 붙들고 부축하지 않으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때 우뚝 서서 산을 정복하던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이제 할아버지는 마치 걸어 다니는 기역(ㄱ)처럼 보였다.


정상에서 환하게 웃던 사진 속 할아버지와 앞을 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는 할아버지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무게가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허리가 기역(ㄱ) 자로 굽은 할아버지를 보며, 노화나 늙음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형상화된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었다. 소파에 앉아 계셔도 굽어버린 허리 때문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셨다. 몸속의 장기들마저 다 굽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중력 탓에 제대로 음식물도 소화되지 못할 것 같았다. 밥이 식도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머무는 상상을 하자, 노화라는 것이 어쩐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허리가 굽어갈수록 할아버지의 기억도 함께 기울어졌다. 처음에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자식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에는 시간과 공간의 감각마저 잃어버렸다. 굽은 허리의 할아버지는 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 그 어딘가에서 사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성품이 워낙 곱고 온순하여 치매 증상으로 유별난 이상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억을 잃어버렸다. 24시간 내내 누군가가 곁에서 돌봐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작은 아빠는 미국에 살았고 큰고모와 작은고모는 할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아빠는 백혈병 환자였다. 오랜 시간 논의 끝에 할아버지는 90세가 넘은 나이에 요양원에 입소했다.


요양원에는 오래 사는 어르신도 있고 금세 세상을 떠나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후자에 속했다. 입소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내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모습도,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이후 나는 아빠는 등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처럼 허리가 굽을 일은 없다고 스스로 주문처럼 되뇌었다. 아빠는 늘 눕거나 엎드린 채로 글을 썼기 때문에 허리가 굽을 일이 없다고도 근거를 덧붙였다.


그런데 아빠가 일흔을 넘기면서부터 어깨와 허리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처럼 앞쪽으로 기울어지지는 않았지만, 젊은 시절 왼쪽 팔을 괴고 오른팔로 글을 쓰던 습관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낸 세월이 더해지며 어깨는 한쪽으로 기울었고, 자연스럽게 허리 또한 휘어 버렸다. 그래서 아빠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몸이 옆으로 기운 모습이다. 억지로 자세를 펴려 하면 통증 때문에 아빠는 낮게 신음한다. 때로는 아빠가 허리를 펴려 애쓰다 포기하는 모습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20대의 나는 할아버지의 굽은 허리를 보았고 30대의 나는 아빠의 기운 어깨를 바라보고 있다. 두 모습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을 뿐 결국 시간이 가져온 변화인 셈이다. 나는 허리가 꼿꼿하고 거북목도 아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빠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자세를 확인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은 눈에 잘 띄지만 정작 내가 늙어간다는 건 좀처럼 실감 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의 흐름이 할아버지에서 아빠로 이어져 왔듯 언젠가는 내게도 이어질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늙어갈까.


허리든, 어깨든, 기억이든 무언가 조금씩 기울어져 가는 것. 이는 시간이 가져오는 피할 수 없는 변화다. 그러니 비뚤어져 펴지지 않는 아빠의 어깨를 보며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허리가 굽은 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점점 이울어가는 아빠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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