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색, 계> 원작과 영화
나는 젊은 시절 타이완에서 공부를 했고 그 후 80년대 말부터 베이징에 거주했지만,
그때까지도 <색, 계 色, 戒>라는 소설도,
그리고 소설의 작가 장아이링(張愛玲 장애령)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1978년에 발표된 소설 <색, 계>는 당시 중국 대륙은 물론 중화권 전체를 휩쓰는 인기 소설이었고 더불어 작가 장아이링을 모른다면 당시 젊은이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할 정도였다.
중화권 젊은 층의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소설 속의 내용 중에 너무 적나라한 정사 장면의 묘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감독한 리안(李安 이안)조차도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이건 에로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치부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일부 평론가들은 <색, 계>의 주인공 찌아즈를 중국인의 자존심을 깎아내린 창녀 취급을 했다.
하지만 리안 감독은,
'소설을 읽은 후 소설의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소설의 내용은 섹스가 받쳐주는 애정 행각 외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중국 당국의 정식 출판 허가는 2011년이었다.
그전에 무수히 시중에 돌아다니던 책은 전부 해적판이었던 것이다.
출판물에 엄격한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광풍처럼 몰아친 장아이링에 대한 열풍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이 나오고 영화도 나온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중국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장아이링에 대한 카페, 블로거 등이 차고 넘친다.
영화의 경우,
감독판에 비교하면 30분 정도 삭제된 분량으로 개봉되었지만 원판은 중국의 사이트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작가 장아이링은 1920년 상하이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외증조부가 청조 말기 양무운동의 주역 리홍장(李鴻章)이었기 때문에 꽤나 윤택한 가정에서 성장한 셈이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상하이의 금수저 집안)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으며 상하이를 사랑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들은 모두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아이링의 본명은 장영(張煐)이다.
한 때 리앙징(梁京 양경)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개명한 이름 아이링(愛玲)은 영어 이름 "Eileen"을 번역한 것이다.
그녀는 은둔생활을 즐겨했기 때문에 남아있는 사진이 별로 없지만 특이한 사진 하나가 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살고 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발견된 사진인데 김일성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린 사진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해가 1995년이고 김일성이 죽은 해가 1994년이니 그녀가 죽기 1년 전에 찍은 최후의 사진인 셈이다.
장아이링의 말로(末路)는 그녀가 쓴 많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비장하고 쓸쓸했다.
남편의 바람기에 끝없이 고통을 당했고, 병 치다꺼리까지 맡아야만 했던 것이다.
74세에 생애를 마감한 그녀의 주검이 발견된 모습도 죽은 후 일주일이 지나 부패된 시체였다. 장례 또한 아무런 절차도 없이 로스앤젤레스의 바닷가에 유해가 뿌려졌다.
따라서 그녀의 묘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덕후들이 만든 그녀의 작품과 흔적으로 가득 채워진 북카페가 상하이 어딘가에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본래 영국 유학을 꿈꾸었지만 전란으로 무산되고 대신 홍콩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찌아즈가 홍콩과 상하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이때의 경험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마침 발발한 태평양전쟁으로 홍콩에 일본군이 진주하자 그녀는 상하이로 돌아와 초보작가로 데뷔했다.
1942년 이때부터 그녀가 8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가 아직도 상하이에 보존되어 있고 심지어 입장료까지 받고 있다. (주소: 常德路 195号 常德公寓)
24세가 된 그녀는 상하이 문단의 대선배이자 나이도 14살이나 많은 후란청(胡蘭成 호란성)에게 홀딱 반해 결혼도 하기 전에 동거부터 시작했다. 후란청은 작가이자 왕징웨이 국민당 정부의 선전부 부부장을 겸하는 고위층이었다.
하지만 후란청에게 여자는 장아이링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글에서 밝혔듯이 7~8명의 여자가 더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동거 3개월 만에 밝혀졌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5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주로 장아이링이 매달렸다고 한다.
1947년 후란청과 정식으로 결별한 후 1년 정도 이곳에 더 머물던 그녀는
"나는 그저 시들어만 갔다"라고 표현할 만큼 상심 속에서 지냈고,
이후 홍콩을 거쳐 1955년 미국에 난민 신청을 하여 1960년에 비로소 미국 시민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당시 65세로 나이차가 30살이 나는 작가 직업을 가진 남자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임신했지만 생활고로 인해 낙태하고 말았다.
75세에 세상을 등진 장아이링의 유서에는 "빨리 화장하고 유골은 넓은 들판에 뿌려달라"하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