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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노력이 항상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

by 박승연
나는 갖은 노력을 해서 내 마음에 들려고 하는 사람 보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데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좋아.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20대 초반의 영글지 않은 새파란 청년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난해한 말이다. 앞에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알겠으니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물음표를 던졌건만, 그 물음표는 정답이 아니라 '완벽한 오답'에 가까웠다.


이제 와서 두 남녀의 대화를 관찰하고 있는 내 시점에서는 이렇다. 시간이 지나며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오래되어 감정이 빠지니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저 때의 나에게는 그저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다들 어릴 적에 꿈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꾼 적이 있지 않은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진원의 <고칠게>라는 발라드를 아는가? 가사를 아래에 첨부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왜 내가 싫증 났는지 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면 말해줄래? 네가 말하는 그 모습처럼 고칠게 다 고칠게 떠나지 마
진원 - <고칠게> 中


어떤가? 이 남자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붙잡혀 주고 싶고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은가? 음... 별로 기회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나에게 글의 초입에 써놓은 대사를 말한 사람은 이런 생각으로 말하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으레 짐작해 볼 뿐이다.



사람의 심리가 저렇게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로부터 내 행동 양식은 달라졌다. 원래도 눈치를 보는 성정은 아니었건만, 눈치를 더 안 보기 시작했다. 이럴 때 쓰는 옆 나라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공기를 읽는다.' 나는 충분히 공기를 읽을 능력이 되건만, 읽은 공기를 낭독하지는 않는다. 왜?


내가 눈치를 보고 타인의 기준에 맞게끔 행동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꾸며낸 내 모습일지언정 내 본래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다. 더욱이, 그런 연기를 지속해서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적인 공간에서 사회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내가 노력을 한다고 해서 알아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주고 좋아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눈치를 안 본다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의 불문율을 어겨가면서 행동한다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이렇게 하면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내 모습을 꾸며낸 가면을 쓰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의 원리를 깨닫고 바로 실천으로 옮겨봤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첫째,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건 나를 싫어할 사람은 싫어할 것이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할 것이다. 물론, 내가 노력하면 그 모습을 보고 좋게 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걸 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끝까지 못 해줄 거면 잘해주지도 말아라 라는 연애에서의 격언이 있다. 나는 이걸 지키며 내 있는 그대로 살아갈 뿐인데, 보너스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둘째,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이제 고려해야 할 변수가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 수학도 그렇지 않나. 변수가 2개에서 1개로 줄어들면 그 해를 구함에 있어 어려운 정도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변인이 줄어든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사용해야 하는 에너지가 극도로 감소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보이는 반응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남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겠지.'라는 짐작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타인이 나에게 보이는 태도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궁금해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보이기로 선택한 것이므로 상대방이 먼저 '사실.. 나 가면을 쓰고 있었어'라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고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이상. 굳이 궁금해하지 않는다.


종합해 보자면, 내가 그리 좋아라 하는 효율성의 추구에 도달한 듯 하다.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그러한 나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리라는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게 이러한 가르침을 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있었을까? 분명히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을 텐데,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답답한 마음이 삐죽 튀어나온 것일까. 아무렴 어떤가. 나는 이 변화에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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