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성

논점이 이탈되었지만, 남겨놓고 싶네요.

by 박승연

관성(慣性)

물리학에서는 물체가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의미합니다.

인문학에서는 개인이나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사고방식, 행동패턴, 가치관을 말합니다.


너무나도 달라 보이는 두 분야에서 사용되는 관성이란 말은 결국

'외부의 입력이 없을 경우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관성은 도움이 되기도, 방해가 되기도 하는 양면성을 띄고 있습니다.

양면성은 말 그대로 하나의 대상이 이질적인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음을 말하기에

흑도 백도 아닌 중립의 상태인 0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과 -1이 동시에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수학적으로는

(+1)+(-1)과 0은 동일하게 취급되기에 등식을 이용하여

(+1) + (-1) = 0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저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죠.

가지고 있는 자산을 그대로 방치하여 손해도 이득도 보지 않은 상태와

+100만 원의 수익을 보고, 곧이어 -100만 원의 손실을 입어 수익이 0인 상태가


숫자는 동일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의 경험이 다른 것처럼요.




물리학에서 연산자를 다룰 때 '교환 가능'이라는 개념이 출현합니다.

[A, B] = 0인 경우가 교환 가능, [C, D] ~=0인 경우에 교환 불가능이라고 하죠.

교환자를 취한 경우를 풀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A, B] = AB - BA = 0

수학적으로 따지지 말고, A와 B를 각각 특정한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의 효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A가 일어나고 이어서 B가 일어난 상태는 AB라고 표현이 가능하고

마찬가지로 순서가 반대로 일어난다면, BA라고 표현이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사건 A와 B가 '교환 가능하다.'라는 말은 아래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와 무관하게 동일한 효용을 낸다."


우리 주변에 교환 가능한 사건의 짝과, 불가능한 사건의 짝을 한번 맞춰봅시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하는 상황과

운동을 먼저 하고 밥을 먹는 상황은 교환 가능한가요?


깊게 생각을 해보지 않아도, 둘은 교환 불가능한 사건임을 쉽게 생각해내 일 수 있습니다.

밥을 먼저 먹게 되면 운동을 할 때 속이 불편하겠지만,

운동을 먼저 하고, 밥을 먹게 되면 오히려 체내에서의 음식물 섭취에 따른 혈당 상승이 억제되어

췌장이 굳이 인슐린을 분비해서 내분비계의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덜 해도 됩니다.


보상이 먼저 주어지고, 보상에 대응하는 용역을 제공하는 경우와

용역을 먼저 제공한 이후에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에는 어떤가요.


노동법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이상적인 시스템과 더불어

사람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을 덕지덕지 붙이지 않는 이상

둘은 교환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돈을 먼저 받기를 원하고,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돈을 용역이 끝난 이후에 지급하기를 원하죠.


그 둘의 절충안이 기본임금의 지급에 덧붙여, 성과에 따른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노임의 지급방식이 운영되고 있음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사건은 전후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인 실체이므로 '교환 가능'한 사건의 짝이 쉽사리 찾아내기란 쉽지 않아 보이네요.


도덕적 해이도 없고, 사회적 시스템이 촘촘하게 잘 작동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은

마치 고등 수준의 물리학에서 공기저항과 마찰력이 없음을 가정에 두고 물체의 운동을

분석하는 상황과 닮아 보입니다.


다만, 물리학에서는 그런 가정이 실제의 시스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학습하기 위한

적절한 열화판으로 취급되는 것에 비해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정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걸리는 것들이 많습니다.




관성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성질 자체는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

하나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긍정적인 행위에 관성이 연결되면 긍정적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부정적이죠.

결국 사용을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에 관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결국 부정적 행위에 대해서도

관성을 가지고 반복함이 뻔하기에. 모든 측면에서 관성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결국 바라는 게 너무 많은 어려운 일이죠.

하던 대로 하고 싶은 건 하지 말라고 하고,

안 하고 싶은 것은 관성을 가지고 꾸준히 하라고 하는 거죠.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라는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명체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우주의 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전체 시스템에서의 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국소적인 계에 한정 지어 무질서도가 감소한다고 할지라도,

그 주변에 영향을 받는 시스템까지 고려하게 되면 무질서도는 증가하고 있죠.


생명체는 무질서도가 증가하지 않는 시스템입니다.

유기물은 외부 환경과 반응하여 분해되어야 함이 마땅한데,

생명체는 외부 환경의 무기물과 유기물을 이용하여 신체를 보전하고,

끊임없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국소적으로 이겨내기 위한 노력을

삶 전체에서 이어나가는 것이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네요.

물리를 손에 놓은 지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뭐라도 끄적이고 싶은가 봅니다.


이학계열인 물리학은 나에게 금전적 보상을 제공하는 삶의 수단이지만,

직업인이 되고 난 이후의 내 삶에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네요.


결국 사람은 하위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 욕구가 출현한다는

매슬로우의 이론이 나에게도 적용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공계 학문은 정답이 있어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적절한 초기 조건이 있고, 논리의 전개가 정확하다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죠.

물론 이런 기계론적인 우주관은 이미 부서진 지 오래되었지만,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 까지는 정답이 존재하는 것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삶에서는 정답에 가까운 것들은 있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정답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은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정답이라고 말을 하려면


인간의 도덕적 해이의 배제, 한 없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과정

사회적 시스템의 빈틈없는 설계 등

가정을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지금까지 허상을 쫓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에 대한 허탈함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답이 없는 대상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잘못된 것도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닌 것이죠.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특정인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판단이 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시대정신이 변해 과거의 행동이 그럴만한 것이었다고 재평가되는 일도 잦습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허무해졌습니다.

결국 정해진 것도 아무것도 없고,

정답도 정해진 것이 없는 혼란한 세상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감이 옳은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을 품고 있죠.

위 주장이 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위 주장의 절대성이 담보되어야 하는데, 앞뒤가 안 맞으니까요.


그래서 논리적 전개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그냥 맞다고 인정하는 '공리'라는 것이 존재하나 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공리를 세우는 것이 20대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 따지지 않고,

옳다고 믿고 그 가정 아래에서 삶에 충실하자.


사람이 살아가는 데 철학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자동차를 잘 운전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구동 방식과 엔진의 원리를 알 필요는 없으니까요.




가끔은 생각을 좀 줄이고

머리를 비우고,


세워놓은 기준에 이탈되지만 않은지 주시하면서

그냥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애초에 이 글도 논점을 아주 많이 이탈했지만,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목적 자체가


내가 어떤 시기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엿보기 위해서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내 모습에서

망가진 로봇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소년이 보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