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와 가지가 짧은 생으로 기억된 이유
며칠 전, 눈이 한창 내리던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지만,
눈이 소리를 삼켜버린 탓에 주변은 유난히 조용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늘 그렇듯 큰길 대신 빈 밭 사이로 난 지름길을 택했다.
겨울의 밭은 사람들이 일부러 피하는 장소라 그 길에는 좀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수확을 끝낸 밭은 계절마다 그렇게 비워진다.
여름에는 사람과 작물로 가득 차 있다가도 가을이 지나면 급히 정리되고,
겨울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겨진다.
눈 아래의 밭 역시 이미 모든 일을 끝낸 뒤였다.
고랑과 고랑 사이에는 작물이 있던 흔적만 낮게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앙상하게 마른 줄기 몇 개가 눈을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잎도, 열매도 사라진 줄기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식물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줄기의 높이와 가지의 갈래를 보니 아마 고추나 가지였을 것이다.
여름 내내 밭을 채우고 있었을 식물들이 이제는 이름조차 흐릿해진 채 겨울 한복판에 남아 있었다.
그 줄기들은 제 몫을 다한 뒤 자연스럽게 사라진 흔적처럼 보였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추와 가지의 마지막 모습,
한 해 동안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겨울 앞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익숙한 장면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줄기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알고 있는 고추와 가지는
본래 여러 해를 살 수 있는 식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향의 땅에서는 서리에 생이 끊기지 않고,
줄기와 뿌리를 남긴 채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여러 해에 걸쳐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은 언제나 정확하지만 어딘가 실감 나지 않는 지식으로 남아 있었다.
책과 설명 속에서는 분명 다년생이었지만, 내가 현실에서 마주한 고추와 가지는
언제나 첫 해의 끝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부지런히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기 전 밭에서 사라지는 모습만이 그 식물들의 전부처럼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다년생이라는 말은 중요하지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는 정보가 되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생의 나머지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여러 해를 산다는 가능성은 현실의 이미지와는 좀처럼 겹쳐지지 않은 채
기록 속 문장이나 어딘가 따뜻한 지방의 풍경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의 겨울이 그들의 고향과는 달리 지나치게 추운 탓이었을까.
아니면 한 해 동안 수확을 마치고 곧바로 밭을 정리해 버리는 농업의 방식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둘 중 하나만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서리는 식물의 생을 멈추게 했고, 농업은 그 멈춤을 당연한 끝으로 만들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기후와 겨울을 남겨두지 않는 방식이 겹치면서
고추와 가지의 생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잘려 나갔다.
수확을 마친 뒤 줄기를 베어내는 일은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밭에 남아 있는 마른 줄기는 정리되지 않은 흔적이 되고,
때로는 관리가 덜 된 밭의 표시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베어낸다는 행위는 식물의 생을 마무리하는 결정이기보다는
밭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식물이 살아낼 수 있었던 다음 해의 시간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베어낸 줄기 아래에서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을지도 모르고,
조금 덜 추운 겨울이었다면 다음 계절을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은 밭을 정리하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우리는 식물의 생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을 더 이상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추게 해 왔다.
그리고 그 반복은 어느새 고추와 가지가 원래부터 짧은 생을 가진 식물이라는 인상을 굳혀버렸다.
우리가 바라본 것은 언제나 봄과 여름, 그리고 초가을까지였다.
고추와 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간,
우리가 필요로 하고 수확할 수 있었던 계절만이 그 식물의 생애로 남았다.
그 이후의 시간은 서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끝난 것처럼 처리되었고,
사실상 처음부터 생의 일부로 계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실제의 모습으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들이 고향의 땅에서는 여러 해를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분명 책과 기록을 통해 배웠음에도,
그 장면은 언제나 현실의 이미지와는 어긋난 채 어딘가 먼 지방의 이야기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가 반복해서 본 것은 언제나 첫 해의 끝이었고, 그 장면이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 이후의 시간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어쩌면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쉽게 예외로 미뤄버렸던 것은 아닐까.
반복해서 바라본 장면은 어느새 그 생의 전부가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끝내 보지 못한 여러 해의 시간은
가능성이 아니라 예외로 밀려나 아무렇지 않게 지워졌다.
눈이 쌓인 밭에 남아 있던 마른 줄기는 한 해를 다 살고 끝난 흔적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 식물이 살아낼 수 있었던 시간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한 그다음 해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식물뿐 아니라 많은 생을 그렇게 바라봐 왔는지도 모른다.
반복해서 본 장면을 전부라고 믿고, 보지 못한 시간은 쉽게 예외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아직 오지 않은 계절과
가능한 다음 해를 너무도 빠르게 지워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