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이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시간들

고추와 가지가 짧은 생으로 기억된 이유

by 루인

며칠 전, 눈이 한창 내리던 날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이었지만,

눈이 소리를 삼켜버린 탓에 주변은 유난히 조용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늘 그렇듯 큰길 대신 빈 밭 사이로 난 지름길을 택했다.

겨울의 밭은 사람들이 일부러 피하는 장소라 그 길에는 좀처럼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수확을 끝낸 밭은 계절마다 그렇게 비워진다.


여름에는 사람과 작물로 가득 차 있다가도 가을이 지나면 급히 정리되고,
겨울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겨진다.

눈 아래의 밭 역시 이미 모든 일을 끝낸 뒤였다.


고추, By Franz Eugen Köhler, Köhler's Medizinal-Pflanzen

고랑과 고랑 사이에는 작물이 있던 흔적만 낮게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앙상하게 마른 줄기 몇 개가 눈을 그대로 맞고 서 있었다.


잎도, 열매도 사라진 줄기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식물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줄기의 높이와 가지의 갈래를 보니 아마 고추나 가지였을 것이다.

여름 내내 밭을 채우고 있었을 식물들이 이제는 이름조차 흐릿해진 채 겨울 한복판에 남아 있었다.

그 줄기들은 제 몫을 다한 뒤 자연스럽게 사라진 흔적처럼 보였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추와 가지의 마지막 모습,
한 해 동안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겨울 앞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익숙한 장면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줄기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알고 있는 고추와 가지는
본래 여러 해를 살 수 있는 식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고향의 땅에서는 서리에 생이 끊기지 않고,
줄기와 뿌리를 남긴 채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여러 해에 걸쳐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은 언제나 정확하지만 어딘가 실감 나지 않는 지식으로 남아 있었다.

책과 설명 속에서는 분명 다년생이었지만, 내가 현실에서 마주한 고추와 가지는
언제나 첫 해의 끝에서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부지런히 열매를 맺고,
겨울이 오기 전 밭에서 사라지는 모습만이 그 식물들의 전부처럼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다년생이라는 말은 중요하지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는 정보가 되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생의 나머지 시간을 상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여러 해를 산다는 가능성은 현실의 이미지와는 좀처럼 겹쳐지지 않은 채
기록 속 문장이나 어딘가 따뜻한 지방의 풍경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보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나라의 겨울이 그들의 고향과는 달리 지나치게 추운 탓이었을까.
아니면 한 해 동안 수확을 마치고 곧바로 밭을 정리해 버리는 농업의 방식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둘 중 하나만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서리는 식물의 생을 멈추게 했고, 농업은 그 멈춤을 당연한 끝으로 만들었다.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기후와 겨울을 남겨두지 않는 방식이 겹치면서

고추와 가지의 생은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잘려 나갔다.


수확을 마친 뒤 줄기를 베어내는 일은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여겨진다.
밭에 남아 있는 마른 줄기는 정리되지 않은 흔적이 되고,
때로는 관리가 덜 된 밭의 표시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베어낸다는 행위는 식물의 생을 마무리하는 결정이기보다는
밭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식물이 살아낼 수 있었던 다음 해의 시간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베어낸 줄기 아래에서 뿌리는 여전히 살아 있을지도 모르고,
조금 덜 추운 겨울이었다면 다음 계절을 기다릴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은 밭을 정리하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우리는 식물의 생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생을 더 이상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매번 같은 자리에서 멈추게 해 왔다.

그리고 그 반복은 어느새 고추와 가지가 원래부터 짧은 생을 가진 식물이라는 인상을 굳혀버렸다.

우리가 바라본 것은 언제나 봄과 여름, 그리고 초가을까지였다.


고추와 가지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간,

우리가 필요로 하고 수확할 수 있었던 계절만이 그 식물의 생애로 남았다.

그 이후의 시간은 서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끝난 것처럼 처리되었고,
사실상 처음부터 생의 일부로 계산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실제의 모습으로 떠올리지 못했다.
그들이 고향의 땅에서는 여러 해를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분명 책과 기록을 통해 배웠음에도,
그 장면은 언제나 현실의 이미지와는 어긋난 채 어딘가 먼 지방의 이야기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가 반복해서 본 것은 언제나 첫 해의 끝이었고, 그 장면이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 이후의 시간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어쩌면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쉽게 예외로 미뤄버렸던 것은 아닐까.
반복해서 바라본 장면은 어느새 그 생의 전부가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끝내 보지 못한 여러 해의 시간은

가능성이 아니라 예외로 밀려나 아무렇지 않게 지워졌다.


눈이 쌓인 밭에 남아 있던 마른 줄기는 한 해를 다 살고 끝난 흔적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 식물이 살아낼 수 있었던 시간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한 그다음 해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식물뿐 아니라 많은 생을 그렇게 바라봐 왔는지도 모른다.

반복해서 본 장면을 전부라고 믿고, 보지 못한 시간은 쉽게 예외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아직 오지 않은 계절과
가능한 다음 해를 너무도 빠르게 지워버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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