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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라임 Apr 25. 2022

태백 장성 02(맛집)

우리 소도시 기행 02

배우자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만났다. '유로자전거나라'라는 업체의 로마 일일투어 프로그램에서 였다.


하루 종일 숙련된 한국인 가이드에게 흥미로운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로마의 명승지들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다. 아침에 콜로세움 앞에서 주뼛거리며 만났지만, 가이드 포함 6명밖에 안 되는 단출한 인원 구성 덕인지 금세 농담을 나눌 수 있었다. (경험이 있는 배우자에게 들어보니 20명이 훌쩍 넘어갈 때도 있고, 그런 경우 소심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쉽지 않다고 한다.) 점심 식사를 한 테이블에서 모두 함께했고, 투어가 끝난 후 모든 참여자들과 가이드 추천 식당으로 2차까지 나눈 걸 보면, 모두들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였으리라.


나야 운 좋게 투어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러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지만, '로마'라고 하면 일단 'MUST SEE PLACES' 가 많다. 거기까지 갔는데 콜로세움 안 볼 수 없고, 포로 로마노를 굽어보지 아니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실의 입에 손 넣고 사진 한 장 찍지 않고서 로마를 가봤다 할 수 없다. 우리가 자꾸 종특이라며 스스로를 비하하지만, 나도 한국인인지라 엑기스만 핥는 한이 있더라도 남들이 하고 남기는 건 다 해봐야 했다.


하지만 국내 여행은 조금 다르다. 단번에 떠오르는 경주 정도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 넘치는 여행지가 많지는 않다. 워낙에 매체를 통해 자주 접하기도 했고, 언제든 다시 갈 수 있다는 거리감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여행을 할 때는 보는 것보다는 '먹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된다. 해외에서야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도 하나의 에피소드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고 자란 국내에서는 음식에서 실패하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태백 장성 '골목닭갈비', 2022 

태백, 특히 장성은 작은 동네라 맛집 리스트는커녕 문 연 식당도 많지 않아 선택지가 다양하지는 않다. 그래도 외지인 입장에서 태백의 대표 음식을 꼽자면 '물닭갈비' 아닐까 한다. 광부들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소고기, 삼겹살 다음 가는 메뉴이지만, 그만큼 어렵지 않게 자주 접했을 것이다. 전골냄비에 양념에 재운 닭 조각들이 깔리고, 그 위에 제철 채소들이 넉넉히 올라간다. 여기에 육수를 부어 다진 양념이 풀리면 칼칼한 국물이 완성되는데, 광부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고단한 하루 끝에 여럿이서 소주 한 잔 나누기 참 좋은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애초에 태백에 오기 전부터 이 음식을 크게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곳의 맛집을 검색하면 반드시 물닭갈비가 나온다. 그래서 '경험으로 한번 먹어보자'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1인분에 8천 원으로 비교적 저렴하지만, 엄연히 '닭'갈비인데도 닭고기가 푸짐하다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추가 가능한 여러 사리 중 우동면을 추가했던 게 일종의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국물이 졸여지며 우동면에 착 감기는 순간이 있는데, 이때 우동면은 마치 매운 국물이 잘 밴 떡볶이처럼 맛있다. 

그렇게 야채와 사리를 건져먹고 익은 닭고기들을 순서대로 발라먹으면, 볶음밥을 맛볼 수 있다. 김가루와 잘게 썬 야채가 들어가고 들기름 향 은은하게 나는 우리가 아는 그 볶음밥이고, 이 또한 맛이 없을 수 없는 조합이다. 

군산의 일흥옥, 안동의 거창갈비 등은 비슷한 류의 음식을 먹을 때마다 '거기 진짜 맛있었지?'라며 끊임없이 거론하지만, 집 근처에서도 그에 버금가거나 유사한 맛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물닭갈비는 내가 사는 수도권에서는 대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태백에 그렇게나 뻔질나게 찾아갔던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태백의 많은 물닭갈비 식당을 가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 기준 최고는 장성의 '골목닭갈비'다. 식당은 신축 건물에 갓 들어선 느낌이지만 사장님께서 오랜 기간 태백에서 요식업을 하신 내공이 물씬 느껴지는 맛이다. 중독성 강한 육수가 내용물과 잘 어우러지고, 카레가 들어갔는지 고기 냄새 싫어하는 배우자도 잡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블루문 게스트하우스만큼이나 청결하다. 그 동네가 거기서 거기라 중심가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가는데, 브레이크 타임에 모든 의자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바닥 청소를 하시는 걸 봤다. 내가 아무리 집 청소를 로봇에게 맡기는 게으름뱅이 일지라도 식당은 깨끗한 곳이 좋은 법. 어디는 청결이랑은 담쌓고 운영하는 곳도 있는지라 언제나 믿고 찾는 식당이다. 물닭갈비는 인원수대로 주문하고 취향껏 사리를 올리는데, 앞서 말씀드렸듯 우동사리를 권한다. 평소 사리라 하면 으레 라면밖에 몰랐는데, 골목닭갈비 이후로는 사리에 대한 세계관을 확장하게 되었을 정도니 믿고 한 번 가보시길. 



태백 장성 '행복칼국수', 2022 

골목닭갈비에서 1차, 숙소에서 2차까지 하고 다음날 아침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장성중앙시장의 '행복칼국수'. 간판은 이미 색이 다 바래서 '지금도 하나?'싶은 외관이지만, 인구가 많지 않은 이 동네에서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이다. 대표 메뉴로는 고추장, 된장 베이스 장칼국수, 그리고 멸치, 들깨 국물이 있는데, 보통 장, 멸치 칼국수나 칼만두를 드시는 것 같다. 나도 장, 멸치 한 번씩 먹어보고는 장으로 고정하여 먹고 있다. 맵지 않고 구수한 국물에 푹 끓여진 면과 만두를 건져 먹으면 헛헛한 속 달래기에도 그만이다. 기분 탓인지 시골 할머니네 가서 먹던 맛도 느껴진다. 일요일은 문을 닫고, 오후 3시경 까지만 하시니 일찌감치 가서 아침 또는 아점으로 드시길 바란다. 



태백 '초막고갈두', 2022 

끝으로 이번에 처음 가봤지만 절대 좋아하지 아니할 수 없는 맛을 느껴버린 '초막고갈두'의 두부조림을 추천한다. 고등어조림, 갈치조림, 두부조림이 대표 메뉴고 그 앞 글자를 따서 고갈두라고 명명한 식당이다. 보통 2인이 가면 플러스 1인분을 더 시킨다는 후기가 있어서, 우리도 갈치조림 둘에 두부조림 하나 추가해봤다. 갈치조림도 참 맛있는데, 우리는 두부조림 맛이 더 좋았다. 꽤나 매콤해서 한두 입 먹으면 땀이 솔솔 나오는데, 조미료 배합을 어찌하셨는지 감칠맛이 말도 안 되게 착착 감긴다. 그냥 건조하게 '거기 두부조림 맛있어.'라고 하기엔 너무 아쉬운 경지다. 극심한 맵찔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이니 꼭 도전해보길 권한다. 



COVID 때문에 요식업 생태계가 요상해진지는 꽤 됐지만, 태백은 그들 나름의 법칙 같은 게 있다. 일단 네이버에 나오는 영업시간을 전적으로 믿으면 낭패를 보기 쉽다. 영업시간이 주인장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되는데, 특히 손님이 줄을 서 있어도 저녁 7시가 넘으면 '힘들어서 그런데 내일 오면 안 되냐?'는 곳이 많다. 그리고 마감 전 손님이 끊기면 서둘러 영업을 마치는 분위기다. 시장경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분위기라 가끔은 황당하기도 하고, 워라밸의 천국에 온 수도권 일개미들이 감히 불평인가 싶은 역설도 느껴진다. 이러한 로컬룰을 따르자면 저녁엔 무조건 오후 6시 반 전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을 넣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좀 애매하다 싶으면 미리 전화를 해보고 '오세요'라는 주인장의 허가를 받는 게 가장 확실하다.


장성은 규모면에서 소박하지만, 또 없는 건 없다. 파스타와 마카롱 집도 있고, 슴슴한 평양냉면 식당도 있다. 내가 가보고 맛보았다며 아는 척하는 식당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 내내 먹을 리스트가 이젠 어느 정도 채워져서 새로운 곳에 도전할 가능성은 낮지만, 오랜 기간 이곳을 지켜왔고 지금도 많은 손님들이 찾는 식당은 얼마든지 더 있다.


우리는 장성 덕분에 무심코 지나던 소도시의 간판과 숙박시설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었다. '여기 있으면 뭐가 있겠냐?!' 라며 무시 말고 지도상 크지 않은 무명의 도시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뜬금없는 곳에서 나/우리만의 최고 여행지를 찾는 것이 보물찾기 마냥 행복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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