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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BOM Mar 14. 2024

독립만세 : 부모님의 실망과 독립의 상관관계

쿠팡 플레이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안나>에서 안나가 조 비서에게 말하는 장면이었다.

“부모의 실망에 익숙해지는 것부터가 독립의 시작이다.”

라는 대사가 나왔다. 유튜브 숏츠로 영상은 매우 짧았지만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늘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다. 그래서 지금은 거품이 빠지고 있는 공무원부터 해서 공기업까지 긴 시간 동안 '공' 직업을 권하셨다. 거부를 반복한 끝에, 부모님의 실망에 많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부모님도 포기하셨지만, 막상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왜 그렇게 부모님이 공, 공 거리셨는지 이해했다. 


어렸을 때 IMF를 겪었다. 천운으로 그 한파를 피해 갔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아버지는 그 시기에 잘리는 동료, 친구들을 보시며 얼마나 몸서리 처지게 공포에 떠셨을지, 어렴풋이 짐작됐다. 내 새끼만큼은 경제 상황에 따라 생업을 위협받는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욱 공무원을 권하셨던 거다. 

아버지에 더해 어머니도 늘, 

"여자가 애 낳고 직장 생활하면서 경제력 있게 살려면 학교 선생님이 제일이야.”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매번 거절을 대차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어머니가 그 얘기를 또 다시 꺼낼 때 TV 뉴스에서 아이를 낳고 복직하려는 직원에게 회사가 이리저리 보직을 옮기면서 퇴사하게끔 유도한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TV를 가리키면서 

“저거 봐! 엄마 말이 맞지!” 

라고 소리를 버럭 지르셨다. 그러나 그때는 철딱서니도 없고 지금은 제발 있었으면 하는 패기마저 넘쳐서 

“아, 알았다고!” 

하고 찬바람 쌩쌩 날리며 방에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세상에 나갈 때쯤에는 조금 더 나아져있겠지.’

하고 넘겼다. 그게 벌써 15년쯤 된 얘기다. 슬프게도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나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억울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부모님이 옳다고 인정은 했지만 후회한다고는 안 했어요.’

라고 답할 것이다. 진짜 후회하는 일은 따로 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부전공을 선택했던 일이다. 부전공을 학교에 제출하고 난 뒤에 한 친구는

“야, 부모님이 그 과목을 들으라고 하셨대서 네가 진짜 그걸 들을 줄은 몰랐어.”

라며 핀잔을 줬는데, 꽤 뜨끔했고, 실제로도 과목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쉬웠다. 어차피 학교에서 배웠다고 사회 나와서 써먹을지 안 써먹을지 알 수도 없는 것을, 학비도 비싸면 듣고 싶은 거라도 듣는 게 좋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로는 투쟁에 투쟁을 거듭해서 부모님 하자는대로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부모님 말씀대로 구직은 힘들었다.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남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는 건 매번 숨 넘어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공무원이나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지 않아 부모님 속을 썩였던 걸 후회하지 않았다. 나름 내 딴에는 조사도 하고 내린 결정이어서 더 그렇다. 부모님 말씀은 인정하기 싫어도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건 알았기 때문에 공시생 친구에게 부탁해 시험 보는 내용을 봤었는데 보자마자 마음이 접혔다. 그래서 후회하고, 원망하기보다 욕하면서도 구직할 수 있었던 거다.


부모님을 숱하게 좌절시키고, 죄책감도 서서히 느껴지지 않았을 무렵 우여곡절 끝에 취업했다. 2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아버지와 자동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대뜸 물으셨다.

“하는 일은 재밌어?”

“네.”

“그래, 그럼 됐다.”

아버지는 더 말이 없으셨다. 


그 뒤로 잘 풀려서 더 승승장구했다면 어깨에 힘깨나 주면서 내 선택이 맞았다고 나댔을 텐데, 이런 교만함을 하늘은 이미 다 알고 맞춤 제작 된 난관을 때마다 놓아주셔서 

“내 말이 맞지!” 하고 나대기는 커녕 다시 먹고 사는 방법을 고민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미련은 없다. 시간 낭비 같아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은 고집스러움이 얄궂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원하는 대로 선택을 했으니. 미련에 끌려다니지 않는 것은 실패의 쓴맛보다는 달았기에 다음 스텝을 생각할 여력도 생겼다고, 조심스럽게 믿어본다. 만약 부모님에게 등 떠밀려 선택을 했다면 미련에 뒤돌아 보느라 등 떠밀린 일은 그것대로 안 되고, 부모님과 사이만 나빠진 채, 원래 하고 싶었던 일에는 후회만 남았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 처지가 좀 슬퍼도 그때 구직을 두고 부모님을 실망시켜 드려서 다행이다 싶다. 


혹자는 

“부모님 말씀대로 해서 성공했으면 얼마나 좋아?”

라고 따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성공하면 아마 이때다 싶어 얼른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걸 했거나 일을 하더라도 마음 한편에 원망 혹은 아쉬움을 두고 살았을 거라 확신한다. 만족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니 그건 패스하겠다.


이제 구직의 자유는 완전히 쟁취했다. 결혼이 문제인데(…^^…) 구직할 때 단련이 되어 잔소리가 들려오면 미동 없이 말씀드린다.

“확답 못 줘. 계속 기분이 나빠하면서 거기 있을 건지, 아니면 가서 본인 할 일 할 건지 골라.”

그럼 한숨 한 번 쉬시고 돌아서신다. 죄책감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 부모님이 동의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초조해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나, 서운해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권하든지 말든지, 내 선택에 내가 아무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게 천만 배는 더 중요하는 걸 절절히 체감한 덕분이다.


부모님은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존재지만 진로에 있어서의 확신은 누군가 밀어붙인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억지로 선택하여 원망과 미련을 남길 수는 없다. 선택에 지어야 할 괴로움은 스스로가 선택했는지 여부에 따라 기꺼이 질 수 있을 테니 선택이 멍청해 보여도 내가 고르는 게 낫다. 부모님의 실망은 결국 내가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다면 흩어질 것이고, 그러니 키워주셔서 무한히 감사드리는 것과는 별개로 앞으로도 좀 더 제멋대로 선택을 할 것이다. 아무 죄책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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