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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BOM Mar 21. 2024

인생은 내 것이지만 나만의 것은 아니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 시즌2 10화에 재회하는 연인이 나온다. 어떤 오해로 둘은 헤어졌다. 시간이 흐른 후 남자는 여자가 딸이 있는 남자와 결혼한 걸 알지만 다시 만나자고 한다. 그녀는 고민했고, 며칠 후 남편과 아이와 심야식당을 들어가려다 골목길 끝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당황하지만 아이가 그녀만 빤히 올려다보며 살며시 손을 잡는다. 그녀는 남자에게 시선을 거둔다. 대신,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쥐고, 가족과 함께 심야식당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심야식당> 마스터가 읊조린다. 


“인생은 내 것이지만 나만의 것은 아니다.”




인생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살아가지는 게 아닐까?




어릴 적부터 반짝이지도, 특출 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쉽게 섞이지도,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오도카니 서서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10대, 20대 내내 되뇌었다. 당연히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다행히 소극적인 태도는 죽음 앞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보니, 잘 맞는 사람들과 편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하지만 오래 찌그러져 있던 탓에 언젠가 친구가 한 말처럼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오래 가.”

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이 예쁜 암석 따위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정말 그랬다. 그래서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이 들거나, 사람이 벽처럼 느껴지거나, 계획했던 무언가가 되지 않아 스스로가 미울 때면 곧잘 마지막을 떠올렸다. 스트레스의 강도에 따라 방법은 구체적일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한참 힘들 땐 팔을 길게 긋고, 피가 막 솟구치고, 정신을 잃고, 그대로 끝을 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영영 넘어가 이 끝도 없는 자기혐오와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또 어떨 땐 귀를 마구 뚫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난히 큰 소란을 연이어 겪고 있던 때의 어느 날 밤에도 죽음을 떠올렸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큰소리에 폭격당하고, 닥치는 대로 꼬여버려 풀려고 노력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날이었다. 모든 게 다 멈춰버리길 바라며 평소처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친한 언니가 했던 말이 점점 깊어지는 상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또봄아, 진짜 자살은 하면 안 돼. 남은 사람들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유가족들 막 울고, 쓰러지는데… 어휴.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은… 그건 아니야. 주변 사람들 다 죽이고 가는 거야.”


언니는 어릴 때 알던 지인 분의 가족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몇 달 전 장례식에 다녀왔다며 말했다. 항상 밝고 쾌활하기만 하던 언니였음에도 순식간에 장례식장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나는 그런 언니의 표정에서 장례식장의 곡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죽으면, 언니도… 장례식장에 오겠지.’


언니의 얼굴을 시작으로 언니가 말한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비루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해 줬던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손절 비법 영상의 인기가 폭발하는 세상에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 나까지 보태는 것 같아 미안했고, 같은 일로 힘들어하는 모습에 질려할까 봐 겁도 났지만 친구들은 이런 내 마음도 다 알았는지 끊임없이 다정함을 건넸다. 그래서 다른 건 다 접어두고, 다정함을 징검다리 삼아 세파에 쓸려가지 않고, 한 칸씩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들을 머릿속에서 하나, 둘 넘겨보다가 따듯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빚이었다. 엎어져도, 쪽팔려도, 내가 싫어져도 죽지 않고 또 살아가고 싶어서 내 얘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차곡차곡 쌓여갔던 미안함과 고마움이었다. 그런데 자꾸 마지막을 떠올리고 있으니 양심이 이대로 가면 계약 위반이라고, 경고장을 보내온 것이다. 혹여 멋대로 인생을 끊어 그들이 부고장을 받게 된다면 그건 지금까지 긴급 정서 지원에 대한 파산 선고라고, 알람을 울렸다. 솔직히 파산은 너무 고상한 단어고, 그냥 ‘먹튀’였다. 


‘그러면 안 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럽고, 힘들어서 무기력하게 흐르던 눈물이 뚝 그쳤다. 물렁물렁하고 울보 찔찔이인 것도 싫은데 빚쟁이까지 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어느 종교로 보나 '생에 대한 의지를 잔뜩 투자받았으나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못한 사기꾼'이 되어 심판자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옥행 프리 패스나 받을 일이었다. 게다가 친구들이 날 떠올렸을 때 안타깝거나 먹먹하거나 혹은 그래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 진다고 생각하니, 그건 더 싫었다. 진짜 죽고 나면 견딜 몸뚱어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못 견딜 것 같았다. 훌쩍 거리며 새벽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눈물이 서서히 말랐다. 콧물도 더 나오지 않았다. 이미 꽉 찬 콧물을 콧볼이 다 까지도록 팽팽, 풀었다. 그리고


‘히끅, 히끅, 안 죽어.’


하고 이불을 콱 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날 밤, 부엌칼은 고이 칼집에서 아침을 맞았고, 내 팔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사람은 독립적으로 살고 싶은 만큼, 의존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혼자 잘 있다가도, 인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가도, 로봇이 아무리 발달해도, 어찌 됐든 다른 사람과 얽혀 알게 모르게 신세를 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인생은 나만의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상장회사 같다. 대주주는 나지만, 내 삶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지분도 있는 상장회사. 


오래전이지만 누군가 자살을 하면 그 주위 사람의 자살 확률은 지인의 자살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보다 25%가 올라간다는 뉴스를 봤었다. 2020년 뉴스에서는 동료는 3.7배, 가족은 4.5배 더 자살 위험도가 높아진다고 나와있었다. 그러니까 죽게 되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변 사람들의 삶의 의욕도 1/4을 죽여버리게 된다. 죄목이 빚쟁이에 물귀신까지 추가다. 그러니까 죽고 싶더라도 혼자서 결정해선 안 된다. 주주총회를 열든, 주주를 섭외를 하든지 해서 죄다 물어보고, 그래도 죽을 권리가 있다면 그때 결정해도 늦지 않다. (그러나 아마 그때쯤 당신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드시!)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앞으로도 친구들에게 분명 긴급 정서 지원을 요청할 일이 또 생기긴 할 것 같다. 이 울보 찔찔이스러운 성향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대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는 없을 거 같아 힘들 땐 당당하게 구제 요청을 할 요량이다. 그나마 여러 번 지원을 받아봤기 때문에 나름의 회복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처럼 구제 요청을 할 일은 많이 줄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미 받은 투자(라고 쓰고 '빚'이라 읽는다.) 상당해서 다 갚을 걸 생각하면 막막하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빨리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인생이 당신 것이지만 당신만의 것은 아니게끔 투자를 하면 된다. 


방법은 알지만, 하기도 힘들고, 잘 안 되고, 매번 실패하는 것이 딱 다이어트 같아 갈 길이 멀게 느껴지지만 지금까지 받은 위로가 무거워서라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또 살아갈 거다. 언젠가 흑자 전환을 하는 그날을 바라면서. 


나도, 당신도 그렇게 되기를 건투를 빈다.



출처 :

1) 심야식당 포스터

2) 자살 생존자 기사 "한 사람 극단적 선택에 평균 20명 영향, 한국은 더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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