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아침 풍경. 어느 가을
에취.
재채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가을은 나의 코끝에서 먼저 온다. 올해는 유독 한두달 비염이 나를 귀찮게 했다. 그리고 추위에 익숙해질즈음 언제 그랬냐는듯 물러간다. 가을은 나에게는 알러지와 같은것이다.
나는 여름이 좋다. 여름의 푸르름과 싱그러움 그리고 밝은 에너지가 좋다.
가을은 쓸쓸하다. 울긋불긋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아름다움 속에 곧 바닥으로 떨어질 미래가 그려져 어딘가 쓸쓸하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어릴 적 사회수업에서는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로 사계절이 뚜렷한 점을 꼽았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냉기는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365일 매일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들지만 이내 '이마저도 감사하며 살아야지'로 생각이 귀결된다.
유독 짧게만 느껴졌던 여름이 가고 어느새 찬바람이 찾아왔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가을과 겨울의 차이는 이렇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면 가을, 차갑게 느껴지면 겨울.
이불을 한껏 끌어안는다. 몸이 움츠려 든다. 출근하는 날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졌다. 6시 알람이 울리면 고작 5분을 더 자야겠다고 졸린 눈으로 다시알림 버튼을 누른다. 몇번의 토막잠을 더 자고 나서야 비로소 포근한 이불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주말 아침, 오랜만에 알람이 아닌 자의로 눈을 뜬다. 그래봤자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시계를 보고 살짝 실망한다. 더 늦잠자고싶었는데.. 눈이 떠지는건 어쩔수없다.
가족들은 아직 자고 있다. 책을 더 읽고 자겠다고 자는 시간을 자꾸 늦추는 아이로 인해 잠들어야 할 타이밍을 여러번 놓치고 어젯밤엔 잠든 가족들을 뒤로하고나와 아이방 침대에서 나 혼자 잤다. 요즘 피곤한 탓인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면 스르르 저녁잠이 들 때가 많다. 어설픈 시간에 자다 깨면 오히려 밤에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다.
침대에서 한껏 늑장을 부리고 부엌으로 간다. 어제 손설거지를 해둔 컵 몇개와 접시들이 보송하게 말라있다. 식기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준다.
느즈막히 가족들이 일어나면 아침식사를 한다. 주말의 아침식사는 빵집에서 빵을 사오거나 집 근처 카페에 가서 해결한다. 우리 집에는 주말 아침에 빵을 사러 갈 때 사용하는 빵 전용 가방이 있다. 무인양품에서 산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진 저렴한 에코백이다.
빵가게 아주머니는 아주 친절하시다. 항상 밝은 하이톤으로 손님들이 가게에 들어올때, 나갈때 큰 소리로 인사를 해주신다. 빵은 보통 남편과 내가 번갈아가며 사오곤 하는데 아주머니는 빵 가방을 보고 우리가 부부인 것을 알아차리셨다.
오늘 아침은 갓 구워진 흑미 식빵이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서인지 빵을 담은 봉지가 묶여져 있지 않고 살짝 김이 서려있다. 서늘한 가을 아침공기를 맞고 우리집에 온 빵은 아직도 아주 촉촉하고 따뜻했다. 아직 진열대에 진열되기도 전에 집어온 것이라고 한다.
집에 있는 무화과잼, 딸기잼, 땅콩버터 그리고 체다치즈를 꺼내 곁들이니 간소하지만 요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식사 준비가 되었다. 남편은 티포트에 지난 대만여행때 사온 우롱차를 우려냈다. 향긋한 풍미와 살짝 단맛이 나는 우롱차는 잼이 발려진 식빵과 함께하기에 아주 적절했다.
가족의 대화는 방향이 없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다른 주제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식탁 위 우유 상자에 적힌 글자를 보고 옛날 가수나 음악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옆에 앉아 있는 아이는 자기가 모르는 (옛날)이야기만 한다며 뾰로통해졌다.
오늘은 어쩌다 한 가수이자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남편은 이런 말을 했다.
"가수나 배우들은 서로의 영역을 오가기에 참 유리한 것 같아."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목소리였다.
나는 의아한 생각에 다시 이유를 물었다.
"가수만 목소리가 좋아야 하는게 아니야. 배우가 연기를 할 때도 발성과 목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면 '목소리, 눈빛의 총기, 향, 아우라'와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그 사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분위기라는게 뭘까?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분위기 좋은 음악, 심지어 글에서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나의 글은 어떨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거나 화려하지 않은데도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지닌 배우들은 대중들에게 각인된다.
소박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어떻게 하면 나이가 들수록 멋진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될수있을까를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녔던 수학학원에서 그 당시 나의 눈에 꽤 지적으로 보이셨던 선생님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 안에는 짧은 메모가 함께 들어있었고 나는 이 구절을 암기하고 오래도록 기억한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중에서.
아침에 상념이 길었다. 이 또한 주말이니 가능하다. 주중은 주중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그 의미가 있는 법. 나의 주말 아침은 이렇게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