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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수 Nov 08. 2023

발표 울렁증

나는 누구 앞에서 준비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게 서툴다. 그래서 준비되지 않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만남은 시시때때로 있기 마련이라, 결국 서툴게 말해버리는 일은 생기고야 만다. 그런 날은 머릿속이 복잡하다.

‘나는 왜 00이 처럼 말을 떨지 않고 말하지 못할까?’

‘아예 그 자리에 있지 말걸 그랬나’

‘나를 말 못 하는 사람으로 보겠지..‘


오늘이 그랬다. 전 교직원이 모여 책 한 권을 읽고 소감을 짧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필 내가 제일 먼저 지목되어 발표도 하게 되었다. 발표의 1/2 지점에 다다랐을 때 교사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결국 손이 덜덜 목소리가 음매음매 할 뻔하다가 끝났다. 오늘은 그래도 선방이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키지는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내 모습이 참 일관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전교직원이 모두 참석해 봐야 50명! 교실의 아이들은 30명이다. 그럼 내가 20명 차이로 울렁증이 생긴단 말인가? 하루에도 몇백 명의 아이들과 만나 수업을 하고 경력은 10년이 넘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10년 넘게 교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난 30년 가까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걸 어려워하며 살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낯가림이 심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표현만 절제되어 있을 뿐( 최소한 어디로 숨진 않으니) 낯가림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증거다.  결혼 적령기일 때 나는 스스로 결혼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유가 소개팅에서 맘에 드는 사람한테 다가가고 싶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막상 만나면 부끄러워 말 못 하고 끝나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낯가림을 하며 긴 세월을 지내고 있으니, 발표 울렁증 겪는 사람도 나고 10년 넘게 수업을 하고 있는 것도 나다.


오늘의 발표시간과 수업시간의 차이점을 생각해 봤다.


1. 수업은 준비된 말을 하는 과정이다.

 오늘 발표는 준비를 덜했나?

2. 대상은 나에게 배우려는 학생이다.

    대상은 교사이다.

3. 순수한 아이들이다.

   성인이다.


이 세 가지로 추려봤다. 1번은 패스 오늘 발표도

준비했고 써가기까지 했다. 2번은 오늘의 교사들도 내 발표를 경청하려는 모습이 있었다. 2번도 패스.


그럼 내가 발표 울렁증이 있어도 교사일 수 있는

이유는 3번?


사실 나는 아이들이랑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수많은 다양한 아이들이 있는 만큼, 그중 나를 좋아하는 학생 1명은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다. 그리고 그 한 명이면 만족한다. 그 신념으로 수업을 이어가다 보니 실제로 1명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는 경험을 하게 됐고, 그 믿음이 내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준 것 같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사랑이 내 발표 울렁증의 치료제였던 걸까? 오늘의 발표는

영~ 심란했지만, 수업은 아이들 덕분에 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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