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헤어지자. 나도 힘들어.”
남자 108이 불쑥 말했다.
분명 내가 먼저 끝내고 싶었는데, 원하던 해방이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 잘 가.’
그 한마디면 됐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을 받아들이면 의리를 저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의리일까?
그건 그냥 나 혼자 만들어 낸 의무감이었다.
그때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살았고, 그는 새벽 알람에 이끌려 일터로 나갔다.
같은 나이였지만 사는 결은 달랐다.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 같은 게 있었다.
먼저 등을 돌릴 자유는 나에게 있었는데 정작 먼저 떠난 건 그였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그가 다시 찾아왔다.
“그냥 보내줄 수 없어.”
그 말은 위협처럼 들렸다.
그는 내가 정말 떠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다.
그래서 분노했고, 결국 그 화살이 내게로 향했다.
그때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살아남기 위해 몸이 스스로 얼어붙는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움직이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고 믿었으니까.
무릎으로 허벅지가 눌려 있었으니 어차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영문을 몰랐지만 한참 뒤에 알았다.
내 마음을 묻지 않고 나를 해치는 것은 어떤 이름으로 포장해도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그런데도 그날 이후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내가 싫다고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았잖아!”
“완전히 ‘강제로’는 아니었잖아! 내가 포기했잖아.”
“그 애도 아직 어렸잖아. 걔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 아닐까?”
그러나 그건 그냥 가해자들이 하는 합리화였다.
그는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 자기의 여자친구를 해칠 의도로 성폭행한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 모든 일은 그가 나쁜 남자라서만이 아니다.
여자가 거절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라고, 침묵은 동의를 뜻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남자를 만날 때마다 자기검열을 해야 했다.
“나 같은 사람도 괜찮을까?”
나는 사랑을 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것을 대신 증명해주지 못했다.
감히 말하건대 그것은 나만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내 전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