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를 묻다
“저는 퀴어입니다. 집에서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를 사랑하기에 이 말을 합니다.”
국회 앞에서 한 청년이 마이크를 들고 시국선언을 시작했다.
주위는 곧 조용해졌고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했다.
“시국선언을 한다면서 왜 커밍아웃을 하냐고요?
국가 폭력만이 저를 억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 학교 그리고 제 안의 두려움까지 모두가 방관자였습니다.
이제는 고백하겠습니다.”
박다이달로스는 놀란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그 모습에 가슴이 벅찼다.
단지 모양만 다를 뿐 숨겨야만 했던 시간은 그녀에게도 있었다.
그녀는 늘 ‘참아야 해. 그게 여자의 운명이니까’라는 말에 억눌려 살았다.
인습이 남긴 상처는 폭력보다 오래 그녀를 조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청년의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번호 표시제한’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낯선 여자였다.
“죄송해요…… 잘못 걸었어요.”
짧은 통화였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예전의 자신 같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쥔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청년의 선언과 그 전화가 묘하게 겹쳤다.
세상 어딘가에서 그녀에게 ‘구조신호’가 들려온 듯했다.
밤마다 비명과 욕설, 구타 소리에 시달리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살아왔다.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시간은 결국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침묵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이제는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수없이 물었다.
“정말 내 탓일까? 모든 게 내가 잘못한 걸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 본 적이 없었다.
사회가 정한 규칙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인습의 잘못을 대신 짊어진 채 ‘죄책감’이라는 사슬에 묶여 살아야 했던 것이다.
오래 묻어둔 상처가 다시 나를 부른다.
나는 이제 글로써 그 고통과 마주선다.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창문 너머 어둠 속에서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밖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리고 천천히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