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비 포옹 02화

폭력을 건너는 밤

모성은 때로 숨을 곳이 필요하다

by 몽돌이

해가 오래된 공장 너머로 서서히 기울어 갔다.

박다이달로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아이의 작은 손이 조심스레 닿는다.

“엄마, 엄마.”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다. 마치 아무것도 안 들리는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저녁이 깊어지면 북향집은 금세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벽 틈으로는 찬바람이 쉴 새 없이 새어 들어왔다.

박다이달로스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은 해 지기 전에 꼭 이불을 변소에 숨겨둬야지.

그래야 아기가 덜 춥지.’

그러나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다짐은 또 흩어져 버렸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술에 절어 돌아오는 남자 96(박다이달로스의 전남편)을 피하기에는 여름이 그나마 안전한 계절이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뒷마당에 텐트를 쳤다.

그를 피해 밤하늘 아래로 도망치는 절실한 피난이었다.

담배와 모기향을 챙기면 텐트 속에서 오늘 하룻밤도 안전하게 넘어갈 것이다.

그녀는 별을 세는 아이 곁에서 한쪽 귀만 어둠을 향해 열어 두었다.

(남자 96에게 이름 대신 번호를 붙인 이유는 옛 상처를 떠올리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겨울이 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도는 얼고,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무엇보다 밤이면 어김없이 그가 술이 되어 돌아온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이불 속으로 짐승처럼 숨는다.

문은 잠갔지만 그에게 자물쇠는 종잇장보다 무의미했다.

그가 문을 걷어찰 때 그녀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아이를 두고 혼자 바깥 변소로 달아난다. 여름의 텐트에서 잠시 숨을 곳을 찾았던 경험은 겨울에도 이어졌다. 이미 몸에 익은 긴장과 습관 덕분에 그녀는 밤마다 아이와 함께 비좁은 변소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곳은 합판으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곳이었다. 오물 냄새와 얼어붙은 공기가 뒤섞였지만 그곳은 단 한 가지 이유로 선택되었다. 잠시라도 몸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숨을 한번 몰아쉰다. 그제야 되살아난 모성애에 의지해 문을 조심스레 열고 집 안을 들여다본다. 아이도 본능적으로 숨어 있다.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어 아이를 품에 껴안고 다시 변소로 돌아온다. 아이를 안는 순간 공포는 잠시 물러간다. 그녀는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자신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녀가 맞닥뜨린 폭력은 그녀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랜 인습과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그림자로 지금도 누군가의 일상이 되어 있을 터였다.

잠시도 마음 놓을 수 없었던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녀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익숙한 문장을 떠올린다.

‘낮에 이불을 내다 놓았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아이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은 입술 끝에서 스러졌다.


그녀는 다시 혼이 빠진 얼굴이 되어 담배만 피웠다.

몸은 여기 차가운 현실에 있는데 정신은 멀리 떠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법을 배웠다.

그게 아니면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하루는 늘 생존과 붕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매달려 있었다.

심리학자들은 이 무의식적인 도피를 '해리 증상'이라고 부른다.

폭력은 단지 신체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정신을 조각내고,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생존 감각마저 뒤흔드는 영구적인 상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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