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영웅
박다이달로스는 늘 그렇듯 무심한 얼굴로 시비를 지나 학생회관 쪽으로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도 하늘은 맑았다.
캠퍼스엔 따뜻한 봄냄새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중앙도서관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학생들이 모여 서 있었는데, 다들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도 고개를 들어 도서관을 바라보았다.
남자 77이 도서관 벽에 밧줄로 몸을 묶은 채 매달려 있었다.
동아리에서 몇 번 얼굴만 보았을 뿐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친구였다.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남자 77은 잠시 주춤했다.
박다이달로스는 너무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학생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독재 타도! 파쇼 타도!”
그 외침은 곧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남자 77도 큰 소리로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고 학생들의 함성이 화답했다.
그날 정오는 승리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며칠이 지났다.
다시 정오.
박다이달로스는 시비 앞을 지나며 낯익은 느낌에 멈칫했다.
그리고 또다시 남자 77을 보았다.
그는 같은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엔 얼굴에 절망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학생들은 또다시 도서관 앞에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의 외침이 다 타버린 것처럼 조용했다.
침묵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박다이달로스는 눈물을 삼켰다.
남자 77은 그녀를 바라보며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술만 움직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 백골단이 그를 끌고 갔고, 그는 도서관 옥상에서 제압당한 후 강제 징집되었다.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를 ‘진강우’라고 불렀다.
‘진리를 향해 강하고 우직하게’ 나아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번호로 불렸지만 그는 마침내 진강우라는 이름을 얻었다. 스스로 싸워서 택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는 그의 용기뿐 아니라 이름 없이 묵묵히 버텨온 사람들의 정신도 함께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박다이달로스는 가끔 그날의 하늘을 떠올린다.
그때 자신이 진짜로 용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단지 순간의 열기에 휩쓸린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날의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지금은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너무 쉽게 침묵한다.
어쩌면 그는 지금도 그녀의 침묵을 깨기 위해 그 도서관 벽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