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
고래 뱃속에 갇힌 요다와 같은 내 삶에 전구 불이 '띵' 하고 켜진다.
'근무라서 부대에서 자고 와야 해.'
처음 아이를 낳고 한 달. 조리원을 퇴소하고 남편으로부터 들은 첫마디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나 혼자서 온종일 아이를 보라고? 똥기저귀도 혼자 갈아본 적 없는데? 머리가 새하얘졌다. 시어머니께 SOS를 쳤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훈련이라 일주일 동안 부대에서 자고 와야 할 것 같아.'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해서 어퍼컷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어떡하지? 그래, 친정엄마께 부탁하자.
생전 힘들다 어떻다 약한 소리 하는 법 없던 큰딸의 우는 소리에 당신께서는 생업을 밀어 두고 한달음에 4시간 거리를 달려 올라오셨다. 지금에서야 너무 죄송하고 염치없다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의 아픈 내 몸이 먼저였고 내 아이가 먼저였다.
'이번에는 교육 때문에 한 달 동안...'
눈앞이 하얘졌다. 겨우 겨우 고개를 넘으면 그보다 더한 고개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아, 이번에는 친정으로 아예 가서 도움을 받자.
남들이 보면 이사를 가는구나 싶을 정도로 짐을 챙겨 친정으로 내려갔다. 당시의 내 마음가짐은 흡사 전쟁터로 임하는 군인과도 같았다.
그러고도 넘어야 할 고개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문득 나는 느꼈다. 빛이라고는 없는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를 홀로 걷고 있구나,라고.
빠져나올 수 없는, 언제 끝나는지도 알 수 없는, 아니 애초에 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는 어두운 터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을 보았다.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서 전구에 불이 켜졌다.
군인의 아내로 살며, 누구 도움 없이 연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숨 막힘이었다. 나에게도 육아 우울증이라는 강력한 파도가 거침없이 나를 집어삼켰고, 그 속에 한동안 잠식되어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이는 정말 예뻤지만, 육아는 당연히 엄마가 해야 할 일이었고 인정받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출산 한 달 전까지 계속 일했던 나였기에, 일을 하며 얻는 성취감이 매우 컸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는 활동이 마냥 좋았다. 음악이 너무 좋았던 나여서, 고3이라는 늦은 나이에도 작곡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뮤지컬이 좋았고 그 덕분에 뮤지컬 음악팀에서 음악감독으로 일도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무엇일까? 남들과 차별되는 나만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렇게 온라인 세상에 뮤지컬 육아 팁들을 하나씩 기록해나갔다. 가장 큰 적은 아이도, 신랑도 아닌 시간의 부족함이었다.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까 고민을 하다 새벽에 더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열심히 책을 읽었고, 열심히 기록해나갔고, 열심히 '나'를 브랜딩 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나갔다. 나보다 훨씬 앞서 나간 사람들을 보며 때때로 질투도 하고 좌절도 하며, 많은 배움도 얻으며 마음을 다스려 나갔다.
얼마 전 한 영어책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콘텐츠가 매우 흥미롭고, 고퀄리티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강의를 함께 찍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고군분투하며 만든 콘텐츠들을 강의 준비에 고스란히 사용했다. 온라인 기록들을 관두고 싶었던 순간순간의 고비들을 잘 다스렸다며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경력 단절된 주부라고 우울해하던 나 자신에게 주부라는 경험은 다시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보잘것없다 생각한 내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도 바꿔주었고, 무엇보다 육아가 일로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또한 이번 강의를 계기로 나의 '뮤지컬 육아'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더욱 섰으며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졌다.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롯이 내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그렇게 발견한 곳이 여기 브런치였다.
나는 오늘도 뮤지컬 육아를 통해 내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뮤지컬 육아에 대한 정보를 계속 소개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