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는 소설 속 누군가의 입을 빌려 ‘그가 가봤다더라’며 자신이 꿈꾼 이상적인 국가를 그려낸다. 화폐나 사유재산 없이 금과 은은 노예용으로 쓰고, 보석은 아이들 장난감으로 쓰는 세상, 하루 6시간만 일하고 남은 시간은 각자 자기계발에 힘쓰고, 정신적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세상.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법만 있는 민주적인 국가. 토머스 모어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설정한 이상적인 국가는 그런 국가였다. 여전히 가부장제가 있어 여성은 남성에게 지배당하며, 동물과 자연은 당연히 인간에게 착취당하고, 노인과 병자에게 안락사를 말하고 아이들도 노동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나라. 백인 지배계급 남성이 가진 상상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안정적인 곳을 뜻할 것만 같았던 ‘유토피아’는 사실 그리스어로 존재하지 않는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세 명만 모여도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몇 번 겪은 일이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이 나오고, 내가 별로라고 생각한 것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을 품을 수 있는 세상이어야 진정한 ‘유토피아’일 것이다. 개개인의 수많은 취향과 다양한 기준이 있는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향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그곳이 ‘유토피아’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 명은 대표 없이 각자의 생각을 전달하며 합의해나갈 수 있다. 열 명도 좀 어렵지만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천 명은, 만 명은? 민주적으로 대표를 선정하고 그 대표가 각 그룹의 이익을 위해 대표로 다투는 대의민주주의가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나? 히틀러도 투표로 선출되었다. 누군가의 불만을 ‘다수’의 이름과 ‘대의명분’으로 찍어 누르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유토피아는 없다. 인간은 단 한 번도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가져본 적 없다. 태초의 에덴동산에 던져진다고 해도 나는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유재산이 있으면 빈부격차가 생기고, 노동을 대리하는 자가 생기면 지배구조가 생긴다. 같은 의견을 갖거나 혈연, 지연 등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기 마련이며 그룹에 속하지 않은 이를 배척해나간다. 인간은 단 한 번도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가진 적이 없다. 뺏고 뺏기고, 전쟁은 위험한 거라고 그렇게 배우고 익힌 21세기에도 전쟁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 이유 없이 사랑할 수도 있고 자신을 희생하고 베풀고 도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악의의 존재도 믿는다. 밑도 끝도 없이 시기 질투하고 남을 짓밟아야 쾌락을 얻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이들을 모두 제외하고 선의로 가득 찬 이들만을 모아놓으면 그곳이 유토피아일까.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선정해야 할까. 날 때부터 유전적으로 선택하고 조작하여 선량함을 발현하는 유전자를 선택하고 악한 성향을 제거하는 식으로 인간종을 새롭게 인위적으로 진화시키면 될까. 인간의 성향은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러한 유전자를 특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 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 유전자를 제거했을 때 나비효과처럼 일어날 다른 작용들을 예측할 수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구인류가 악한 성향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척살 대상이 되는 디스토피아 아닐까.
나도 이상적인 세상을 생각해본다. 모두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며, 그리하여 모두가 적당한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세상. 그러나 가능한가?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를 어떻게 일하게 할 것이며, 관리자와 비관리자의 구분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있는 자원을 어떻게 동등하게 나눠줄 것인가, 남들보다 더 갖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유토피아는 죽어서나 가능하다. 아니, 천국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 정정한다, 꿈에서나 가능하다고.
그러나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악폐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고 나라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당신이 나쁜 아이디어를 뿌리째 뽑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어 온 악폐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고 해서 이 나라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풍향을 조절할 수 없다고 해서 폭풍 속으로 배를 저버리지는 마십시오.”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제1권 중 23%, 열린책들, 전경자 옮김)
눈앞에 폭풍이 있고 풍향을 조절할 수 없더라도 배 위에 있다면 뭐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손 놓고 폭풍 속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시도와 노력을 멈춰선 안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작은 선의와 행동들로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비관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낙관과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더 악화일로를 걷을 테니까. 나라도, 내 주변이라도 정신 차리고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고 나를 다잡는다. 어쩌면 유토피아는 결과에서보다 과정에서 추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 각자의 꿈속의 이상향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금은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