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 성실, 사랑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장편소설(2025, 문학동네)

by 책식주희

근면, 성실, 사랑


초등학생 때 가훈을 써오라는 숙제로 내간 문구다. 근면과 성실은 비슷한 거 아닌가 하여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근면(勤勉) 부지런히 일하며 힘씀.

성실(誠實) 정성스럽고 참됨.


'근면'이 가장 앞섰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일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던 아버지. 어린 시절 함께 가족여행을 간 기억은 단 한 번이었다. 인천 섬으로 1박2일이었던가, 2박3일이었던가. 평일에 집에 일찍 들어온 일이 별로 없었을 만큼 ‘근면’했던 나의 아버지.


‘오직 그녀의 것’은 무엇일지 그럼 ‘오직 나만의 것’은 또 무엇일지 내내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의 소설, <오직 그녀의 것>은 주인공 홍석주의 ‘일’로 가득 찬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이 소설을 읽다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것은 비단 우연이 아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석주는 일에 서툰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시간을 따로 내어 추가 업무를 한다. 시키지 않은 필사를 하며,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원고에 대한 애정을 일에 담아간다. 누가 알아주길 바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하다고 여겨 묵묵히 일하는 사람, 홍석주라는 사람은 내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종종 ‘꼰대’라고 놀리곤 했지만, 원칙을 지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사람. 그도 석주처럼 시키지 않아도 기꺼이 남아 야근을 했을까.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귀가하면서, 회식도 일의 연장이라고 하던 게 그가 생각하던 원칙이었을까. 할머니의 소중한 장남, 엄마에게는 무뚝뚝한 남편, 고모에게는 투닥거리던 오빠, 뉴스를 보며 욕하는 보수주의자, 술을 참 좋아하던 내 아버지. 내가 아는 그는 모두 가족 안에서의 모습이다. 그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친 직장에서의 모습은 나는 그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는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의 사수, 교열부의 오기서처럼 퇴직 이후를 얼마 즐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훈장을 발견했다. 수여식 때 가족을 부를 수도 있었을 텐데 사진 한 장 없이 덩그러니 남아있는 표창장과 훈장만이 아버지의 오랜 공무원 근무 경력을 증명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실 어떤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 소설 <오직 그녀의 것> 속 홍석주가 그랬듯이 아버지의 삶은 오직 그의 것이다.


단 한 번의 삶, 오직 자신만의 것. 석주도 오기서도 내 아버지도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았다. 누군가 알아주면 좋을 일이지만 알아주지 않아도 어떠한가. 나도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는 어렴풋한 깨달음이 남는다.



석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냉정하게 돌아보았다. 그것은 닮은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는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263-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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