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첫 감기

점박이 유기견을 입양했습니다

by 이수


시루가 감기에 걸렸다.

츄! 츄! 츄! 엣츄! 하는 재채기를 연속으로 한다.

차가운 콧물 스프레이가 원피스 잠옷을 입은 맨다리에도, 뽀뽀하려는 수작을 부리는 얼굴에도 때때로 흩뿌려진다. 소문난 은평구 에너자이저인 시루가 소파에 턱을 괸 채 약간 무기력해 보인다.


강아지도 감기에 걸리다니. 시루가 주 2회 다니고 있는 강아지 유치원에서도 감기가 걸렸다면 등원을 하지 말라는 공지가 돈다. 아이들 유치원과 똑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낫다.


집에서 각자 쉴 때, 남편은 주로 작은방에서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데, 시루는 쉬다가도 꼭 작은 방으로 가서 남편을 팔에 두 앞발을 얹고 놀아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빠 시작한 지 10분 됐어. 왜 이래~~ 하다가도 남편은 이내 나와서 시루와 터그놀이를 한다.


"시루 거실로 나가라고 하지 왜, "

"음... 나중에 혹시 후회할까 봐. 내 팔 잡고 놀아달라고 했는데 안 놀아줬던 기억이 생기면 힘들 것 같아."


시큰해지는 코 끝, 그리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공유되었다.


한편 그 마음을 인간의 삶에도 적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살이라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 또한 인생이니, 후회하지 않고 현재를 사랑하기.



*


시루의 감기는 분명 올 겨울 첫 폭설이 내리던 날에 걸린 것일 테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목요일,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오늘 저녁에 폭설이 내린다는 소식을 엿듣고 엥? 갑자기 폭설? 하며 로비 문을 나섰을 때, 보란 듯이 내려오던 도톰한 눈송이들.


십여분 지하철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자 그 눈송이들은 빠르게 쌓여 얇은 습자지 같이 도로를 포장해 두었다.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거나 우산을 쓴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나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시루를 만나러 성큼성큼 보폭 큰 발자국을 남겼다.


시루의 저녁밥을 챙겨주고 조금 놀아준 뒤 다시 집을 나섰다. 남편이 대학병원에서 손목수술을 한 날이라 병문안을 가야 했다. 필요하다고 한 물품들을 챙겨 크로스백에 넣고, 삿포로 여행을 갈 때 샀던 패딩부츠와 장갑을 끼고, 우산을 들고 비장하게 집을 나선다. 아파트 문을 나서자마자 밖은 아비규환이다. 후문 주차장 입구는 언덕인데 더 많은 눈이 쏟아져 그 사이 습자지는 두툼한 이불이 되었고. 제설작업이 되어있지 않아 퍼질러진 차들이 무력하게 주황색 눈동자만 깜빡였다. 차를 가지고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조심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큰길에도 학원 버스가 비상등을 켜고 움직이지 못한 채 서있다.


학원 버스 주위로는 반팔을 입은 중학생들이 한껏 신나 눈싸움을 하고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버스 덕분에(?) 때아닌 놀이 시간을 가지게 된 것. 아이들의 볼과 손은 터질 듯 빨갛고 등에서는 김이 난다.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눈을 싫어하게 되는 것일지 몰라. 차 걱정, 길 걱정 대신에 어떻게 하면 친구 등에 눈덩이를 명중시킬지 고민하는 건 너희들만의 특권일지도.


병원에 도착해 불 꺼진 로비를 지나 입원병동으로 올라가 남편과 재회했다. 팔에 커다란 깁스를 하고 링거대를 돌돌돌 끌며 나온 그는, 눈싸움도 하지 않았는데 덥고 건조한 병실의 열기로 볼이 빨갛게 익어 있었다. 덥다고 하여 집에서 챙겨 온 아이스팩과 하루에도 열댓 번씩 스피커폰으로 통화한다는 옆자리 할아버지의 소음을 막을 귀마개와 헤드폰을 전달했다. 열리지 않는 병원 휴게실의 창문으로 "눈이 저만큼이나 왔어" "고생했겠다"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초콜릿을 노나 먹었다. 입원과 수술의 소회를 듣고, 병원 앱에서 내일 먹을 식사메뉴를 골라주었다. 우린 아직 젊고, 심각한 수술이 아니었으니 병문안도 약간의 데이트 같았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눈을 헤치고, 미끄러지지 않게 중심을 잡으며 집으로 다시 돌아와 남은 일과는 시루의 산책이다.

시루야 첫눈이야! 눈 구경 가자! 추운 날 입히려 주문한 하늘색 강아지 패딩이 마침 타이밍 좋게 도착하였다. 호기심 많은 시루는 역시나 눈 속에 코를 박고 열심히 킁킁거리고 코에 묻은 눈을 연신 낼름 거린다.


실외 배변견인 시루는 젖은 땅에서 용변을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눈이 소복이 쌓인 땅에서도 역시나 적합한 스팟을 찾는 것이 오래 걸렸다. 아마 그러느라 발과 배가 젖은 채 오래 돌아다녀 감기에 걸렸을 것이고.


눈 속 산책으로 피곤해진 시루는 아빠 없는 침대의 빈자리를 차지하며 내 종아리에 등을 딱 붙이고선 쌕쌕 잠이 든다.


갑자기 내린 폭설을 뚫고 할 일을 하는 어른의 하루는 첫눈의 낭만과는 왠지 거리가 멀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고 순간의 소중함을 느낀 하루라 마음만은 충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후회하지 않고 현재를 사랑하기. 그것을 잊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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