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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팅 앱 사용자 Sep 09. 2024

당황의 연속과 베로나

편지 4. 9월 5일

언니에게

난 오늘 혼자 베로나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 왔어. 학교 수강신청 문제로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거든. 이렇게 수업이 듣고 싶은 적은 처음이야. 왜냐하면 정말 수강신청을 못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봐 무섭기 때문이지! 과마다 개강일도 다르고, 강의계획서는 아직도 안 떴고, 이탈리아어는 못하고, 도와줄 사람은 없고, 심지어 아직까지 학교에서 교환학생을 위해 운영하는 어학코스도 신청 못했어. 지도를 보면서 겨우 어학당을 찾아갔는데 거기엔 적어도 몇 년은 방치된 것 같은 낡은 건물 하나만 달랑 있었어. 그래서 어학당에 영어로 오프라인 신청은 어디서 할 수 있냐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이탈리아어로 반 배치 테스트는 8일에 본다고 띵소리 적힌 답장이 왔지. 만약에 구글 번역기가 없었다면 이것마저 알아듣지 못했을 거야.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나랑 비슷한 처지라 서로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아. 서로 구글 번역기로 돌린 어설픈 정보를 공유하는데 이런 게 정말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뭔가 웃기고 슬펐지.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아기가 된 느낌이야.



이메일로 작년 이탈리아 교환학생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다들 울면서 수강신청을 했다 하더라고. 그분들이 말하길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니까 학교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어. 그냥 맘 비우고 10월까지 여행을 다니라고 조언까지 해주셨지. 학생 수에 따라 강의실도 계속 바뀌고, 강의계획표는 늦게 뜨고, 무엇보다 개강 전까지는 우리가 영어 수업 목록을 알기 힘들데. 하하, 젠장……

이 소리를 들으니까 그래 이탈리아 여행이나 하자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첫 번째 여행지인 만큼 신중하게 골랐지. 바로 언니가 추천했던 베로나! 베로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조사를 해보니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을로 유명하더군. 사실 여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았다는 증거는 없데. 그냥 관광지로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 인가 봐.



아침에 늦잠을 자고 허둥지둥 기차역으로 갔는데 난 또 당황했어(하루라도 놀라지 않은 날이 없군). 내가 간 기차역은 santamaria novella인데 내가 기차를 타야 할 역은 campo였던 거야! 난 피렌체에 기차역이 3개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허둥지둥 대며 역무원에게 어떡하냐고 물어보니 그냥 아무 기차 타고 내가 출발해야 할 역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정말 그냥 아무 기차나 탔어. 관광안내 책을 보니까 이렇게 표 없이 몰래 기차를 타다 걸리면 벌금을 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역무원도 참 쿨하고 인간적이군. santamaria novella 역과 campo역은 가까워서 3분도 안되어 얼른 내렸지만 긴장돼서 혼났어. 제대로 기차 타고 출발할 때는 긴장이 풀려서 풍경 볼 새도 없이 졸려서 기절했어. 이번 기차 사건으로 나는 내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되었어. ‘걱정을 달고 살지만 허술하고 미리 알아보지 않아 늘 당황한다’



어쨌든 베로나에 무사히 도착해서 피에트라 다리를 지나 로마 극장으로 갔어. 계단 오르기는 힘들고, 해는 안 나고 뭔가 날씨도 우중충 해서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언제 또 베로나에 와보겠어 하고 극장 꼭대기 언덕으로 올라갔어.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청록색 빛의 아디제 강과 베로나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베로나가 정말 이쁘고 귀여운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었어. 강이 흐르고 그 위에 붉은 지붕을 쓴 노란색 건물들이 총총히 박혀있는데 누가 보고 귀엽지 않다고 할 수 있겠어! 같이 교환학생으로 온 은이는 건축과인데 은이가 말하길, 이탈리아는 도시 풍광을 위해 건물 지붕 색, 외벽 색 그리고 층 수 높이까지 다 규제를 한데. 처음엔 아름다움을 위해 공산주의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여기 와보니 납득이 갔지.



같은 이탈리아여도 베로나의 전체적인 색감은 피렌체 보다 더 차분했어. 베로나의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은 연갈색 벽돌과 자주색 벽돌을 차례차례 줄무늬 모양으로 쌓아져 있어 성당이 위엄 있다기 보단 사랑스러웠지. 에르베 광장에 갈 때부터 날씨가 맑아져서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어.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여기저기 구경했는데 동양인이 나밖에 없었어. 엄마품에 안겨 있던 이탈리아 애기는 날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



유명한 줄리엣의 집도 갔어. 줄리엣의 집 입구엔 빨간 하트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어 남다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어 도저히 모르고 지나칠 수 없어. 사람들은 줄리엣의 집 담장에 열쇠고리를 걸거나 외벽에 대일밴드를 붙인 다음, 거기에 자기와 애인의 이름을 적어. 심지어 껌까지 붙여서 글을 써놓은 커플도 많았어. 이건 보고 푸학 웃음이 났지. 건물의 좁은 앞마당엔 진짜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어. 마당에 세워져 있는 줄리엣 동상의 왼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슴을 만지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역시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동상답게 특정 부분만 반짝거리더라. 물론 나도 만졌지! 기념품으로 가슴모양 자석을 팔던데 그건 좀 기괴했어. 한쪽 가슴만 덩그러니 있고 그 주변은 풀로 장식되어 있는데 꼭 터키의 니자르 본주 같았어. 오히려 사면 저주에 걸릴 것만 같은……



내일은 다시 학생증 신청하러 국제협력처에 가. 저번에 10시 40분에 갔었는데 대기 번호 64번을 받아서 기다리기만 하다 돌아왔어. 학교에서 대기 번호를 나줘주다니 무슨 은행도 아니고. 심지어 국제협력처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영업하고 화요일은 쉬어. 역시 이탈리아는 자국민 노동자가 살기 좋은 나라 같아. 내일은 꼭 신청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은경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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