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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팅 앱 사용자 Sep 02. 2024

이탈리아 교환학생은 영어만 해도 살 수 있다는 착각

편지 2. 9월 1일

언니에게


이탈리아에 오면 나 같은 장기체류자는 8일 이내에 체류허가증을 신청해야 해. 난 한국에서 비자만 발급받으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고 엄청 당황했어.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이미 며칠이 지났기 때문에 허둥지둥 서류를 준비했어. 제출해야 할 서류가 생각보다 엄청 많아. 한국에서 든 여행자 보험, 여권 스캔한 것, 학교 입학허가서, 기숙사 계약서, 여권 사진 등등. 설상가상 서류는 다 이탈리아어로 되어있어서 구글 번역기 돌리면서 겨우 작성 중이야.



어쨌든 지금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야. 난 이탈리아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거든. 이탈리아어도 알파벳을 쓰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이 영어를 잘할 줄 알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어. 오늘 장을 보러 갔는데, 시식코너 직원이 나에게 갓 구운 과자를 이탈리아어로 권했어. 내가 못 알아듣고 멍하니 서있자 직원이 친절하게도 과자를 직접 내 손에 쥐어줬지. 그런데 과자가 방금 만든 거라 엄청 뜨거운 거야! 나는 꽥하고 소리 지르며 그 과자를 바닥에 던져버렸어. 옆에 나랑 같은 H대학에서 온 한국인 교환학생 은이도 있었는데, 나와 은이 마트 직원 셋 사이에선 당황스러운 정적이 흘렀지. 은이는 이탈리아어를 한국에서 배우고 와서 나 대신 그분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동안, 난 얼굴이 빨개져 서있었어. 글로 써보니까 뭔가 별일 아닌 것 같은데, 난 진짜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지. 사람은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흐를 수 있더라고. 집 와서 이불을 발로 차며 눈물을 찔끔 흘렸지…… 이탈리아어 공부해야겠어. 하하하하 여기 와서는 절대 공부 안 하기로 다짐했는데(학생이 아닌 듯). 마트 직원에게 미안하군. 그 사람은 악의 없는 행동이었을 텐데. 그것 빼곤 괜찮아. 오늘 이 사건 때문에 울적했는데 언니에게 편지 쓰면서 기분을 달래고 있어.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다면 이탈리아 음식이 생각보다 소화가 잘 된다는 거야. 엄마가 여기 오기 전에 나한테 위도 안 좋은 애가 밀가루가 주식인 나라에 가서 어떡하냐고 엄청 걱정했잖아. 그런데 아무래도 밀 생산국에서 바로 만든 신선한 밀가루를 먹어서 그런지 위가 거북하지 않고 속도 편해. 많이 걸어 다녀서 그런가? 피렌체는 지하철도 없고 버스 배차간격도 길어 많이 걷게 되거든. 어쨌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앞으로도 나의 부끄러운 짓들을 알려줄게.


-은경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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