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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팅 앱 사용자 Sep 04. 2024

피렌체 대학 수강신청과 티라미수

편지 3. 9월 3일

언니에게

난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 내가 제일 걱정했던 같이 지낼 사람들인 룸메이트와 H 대학에서 온 교환학생들 모두 착해. 이탈리아 사람들도 친절하고, 아직까진 인종차별도 안 당했어. 문제는 내가 1년 동안 다닐 피렌체 대학교(University of Florence)의 교환학생 시스템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거야. 일단 모든 서류 처리과정이 오프라인이라 서류를 관할 부서에 직접 제출해야 해. 21세기라고는 믿을 수 없지.


설상가상으로 처리과정도 느리고 부서 간의 소통도 원활하지 않아. 학생증 발급은 까다롭고 쓸데없이 오래 걸려서 개강하고 한 달 후쯤 받을 수 있어. 학생인데 학생증이 없다니! 여행객도 학생도 아닌 상태야. 힘들게 신청한 체류허가증은 두 달 후에 나온다 하더라고. 그전에 운이 나빠 누가 내 가방에 몰래 마약을 넣었는데 경찰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난 한국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어. 쓸 때 없이 구체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군.



무엇보다 지금 제일 힘든 건 수강신청이야. 홈페이지에 수업 내용이 다 이탈리아어로 되어있어서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학교에 직접 가서 영어 전용 수업 목록이 있다면 나에게 줄 수 있냐고 하니까 교직원들이 교환학생 시스템을 잘 몰라서 그런지 계속 내가 들을 수업이 없다고 했어. 그들은 날 외계인 보듯 하면서 ‘넌 여기 학교 학생도 아닌데 왜 여기 수업을 듣니?’라는 표정을 지었지. 그리고 심지어 학교 관계자 중 한 명은 영어 전용 수업은 학사 과정엔 없고 석사과정부터 있는데, 내 학력이 고졸이어서 영어 전용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거야! 이 말을 듣고 정말 그나마 남아있던 내 이성이 산산조각 나 가루로 흩날리는 게 느껴졌어.


아침부터 학교 여기저기를 메뚜기처럼 뛰어다녔는데 다들 내가 들을 수업이 없다고 하니까 진짜 너무 서러웠어. 도무지 수강신청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고, 교직원들은 날 다른 부서에 떠넘기기 급급하고…… 학교 사무실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막 눈물이 나더라. 그래서 후다닥 학교 비상계단 쪽으로 가서 꺼이꺼이 울었어. 저번에 내가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났다고 했는데 이번엔 정말 줄줄 났어.


진짜 이러다 들을 수업이 없어 한국 돌아가는 거 아닌가 덜컥 겁도 나고 말 안 통하는 이탈리아로 괜히 왔나 싶기도 하고. 여기선 내가 이방인인고 스스로 모든 걸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 교환학생들끼리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없는 게, 모두 다른 과수업을 듣고 과마다 홈페이지와 개강 날짜가 달라 거의 다른 대학교를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야. 이탈리아의 대학 건물은 도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학 캠퍼스가 없는 거지. 예를 들어 건축대는 산마르코에, 정치과학대는 노볼리에 그리고 이과대는 모르가니에 위치해 있어. 요즘 다들 직접 학과 건물을 돌아다니면서 수업 정보를 얻느라 기진맥진인 상태야.



그렇게 계단에서 울다가 정신 차리고 찬물로 세수한 다음 시내로 나가 5시간 동안 돌아다녔어. 시내는 두오모 있는 곳을 말해. 기숙사에서 두오모까지 걸어서 25분 거리, 학교는 기숙사에서 10분 거리야. 생각 없이 돌아다니면서 이쁜 거 구경하고 젤라또도 먹고 티라미수도 먹고. 그러니까 마음이 좀 진정이 되더라. 다 잘 될 거야. 설마 한국으로 돌아가겠어? 으응……?



그리고 왜 이탈리아는 이렇게 시스템이 허술하고, 인터넷도 잘 안 쓰고, 모든 게 느릴까 계속 고민해봤지(위에선 생각 없이 걸었다고 했는데 많은 생각을 했군). 내 생각엔 이탈리아인은 별로 욕심이 거 같아. 이미 그들은 온화한 날씨, 아름다운 전경, 두오모, 메디치 가문이 남긴 수많은 예술 작품 등 가진 게 많은 거지. 느긋하게 밥 먹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하며 애인과 사랑을 속삭이고.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은 쉬엄쉬엄 편하게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아직 내 추측 일뿐, 사실 이탈리아인과 깊은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어쨌든 느린 그들 사이에서 혼자 바쁘게 움직여도 딱히 일이 해결되진 않겠더라. 마음 편하고 느긋하게 먹고 지내야겠지. 전 이탈리아 교환학생들도 잘 지냈으니까 나도 어떻게든 될 거야. 그렇게 믿어!

 -은경이가


P.S

오늘 질리라는 유명한 카페에 가서 티라미수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 내가 여태 먹은 티라미수는 티라미수가 아니었어! 입에서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는데 크림이 느끼하지도 않고 오히려 산뜻해서 그 자리에서 10개는 거뜬히 먹을 수 있겠더라고. 오늘 티라미수 덕에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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