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유희사> <파괴지왕> <식신> <소림축구> 외
주성치 영화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사랑’이다. 주성치가 사랑을 그리는 방식은 계속해서 진화해 왔다.
초기 주성치 영화 속에서 주성치가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은 대체로 주성치가 첫눈에 반해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여성들은 주성치가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무언가로 그려진 경우가 더 많다. 그 과정에서 상대 여성의 마음이나 주체성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주성치만 있을 뿐이다.
영화 속 주성치는 사랑하는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한다. <당백호점추향(1993)>에서 주성치는 아름다운 부인을 7명이나 얻고도 공리에 반해 공리가 몸종으로 일하는 집에 하인으로 위장취업한다. 주성치는 공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눈에 시퍼런 멍이 들거나 코피를 흘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로는 귀여운 허세를 부리거나 약한 척을 하며 여성의 동정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영화는 주성치가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렇게나 애쓴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유발한다. 이 과정에서도 여성의 마음은 그려지지 않는다. 주성치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는 여성들은 주성치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어야 하는 대상으로 표현될 뿐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사랑을 쟁취한 후에는 여성은 그저 이미 쟁취한 대상으로 그려지거나(<도협(1990)>), 시간이 지나면 찬밥신세가 될 운명으로 묘사된다(<가유희사(1992)>).
주성치가 라디오 DJ이자 희대의 바람둥이로 등장했던 <가유희사>에서, 주성치는 장만옥을 유혹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할리웃 영화광 장만옥을 위해 각종 할리웃 영화를 따라 하거나 비슷한 영화적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 영화 속 장만옥은 사랑 앞에서 순수한 인물이다. 장만옥은 자신에게 키스를 한 주성치에게 “(지금 이 키스는) 나만 사랑하겠다는 맹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성치는 다르다. 여자를 꼬시는 주성치의 묘기, 일명 ‘에펠탑 키스’가 끝난 뒤, <사랑과 영혼(1990)>의 주제곡 ‘Unchained Melody’이 흘러나오던 레코드판이 멈추면서 주성치의 변절을 암시한다. 이미 장만옥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주성치는 역시나 다른 여성과 양다리를 걸친다. 장만옥이 주성치의 양다리 현장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주성치는 우연한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기억 상실증에 걸린다. 주성치가 유혹했던 그 많은 여자 중에 주성치를 간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주성치에게 복수하고 싶은 장만옥만이 있을 뿐이다. 장만옥은 복수의 칼날을 갈며 <미저리(1990)>의 ‘애니’에 빙의했으나 결국 주성치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기억을 잃은 주성치는 번번이 장만옥을 골탕먹이지만 끝내 둘은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
양다리를 걸치고 여자를 배신했으며 기억을 잃고 난동을 부리는 남자, 그리고 그의 곁을 지켜 주는 여자. 묵묵히 남자의 옆자리를 지키는 여자가 바람둥이 같던 남자를 고쳐 놓는다는 <가유희사> 속 사랑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보여 준다. 찜찜한 해피엔딩이다.
주성치가 동네 바보 취급을 받고도 웃어넘기는 순진한 청년으로 등장했던 <파괴지왕(1994)>에서, 주성치는 종려시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만 용기가 없어 다가가지 못한다. 겁쟁이 같은 모습에 종려시의 마음이 떠나갈까 봐 걱정하면서도 가필드 가면을 뒤집어쓰고 위기에 처한 종려시를 구한다. 가면 뒤의 존재가 자신임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주성치는 무술을 배워 용기 있게 시합에서 이긴다. 주성치의 진심을 알게 된 종려시도 주성치와 사랑에 빠지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종려시가 겁쟁이 같던 주성치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남성의 개인적 성취가 곧 사랑을 달성하는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이처럼 주성치 초기 작품들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트로피 같은 존재나 부수적인 산물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후기 작품들에서는 이와 사뭇 다른 전개를 보인다. 여전히 주성치가 연기하는 인물은 찌질하고 모자라지만, 이제 주성치 영화 속 여성은 주성치를 먼저 사랑하거나 함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주성치를 바꾸어 놓는다. 사랑을 통해 서로의 결핍을 채워 나가는 경우도 있다.
<식신(1996)>의 막문위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사장이나 실제 요리 실력은 꽝인 주성치가 몰락해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를 보살펴 준다. 막문위는 주성치의 열성적인 팬으로, 진심을 담아 돼지고기 덮밥을 해 줌으로써 그를 감화시킨다. 막문위는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주성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여자지만, 주성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남자다.
영화 초반부의 주성치는 오로지 이미지와 사업만을 생각하며 본업으로 삼아야 할 음식은 제대로 만드는 법조차 모르는 탐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실력이 들통나며 빈털터리가 되고 난 뒤, 막문위의 음식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때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물이 막문위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주성치는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슬피 울고 나서야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매번 진실을 한발 늦게 깨닫는 주성치와 달리 막문위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표현할 줄 알며, 진정한 사랑을 통해 주성치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주는 인물이다.
주성치 후기 작품 중에는 개성과 특성이 돋보이는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소림축구(2001)>의 조미는 피부병으로 인한 콤플렉스 때문에 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조미가 태극권으로 만두를 빚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주성치는 조미를 절세미인이라고 부르며 조미를 구박하는 만두 가게 주인 앞에서 조미의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실은 만두를 조금이라도 더 집어먹고 내빼기 위해서 능청을 떨었던 것이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이 일을 계기로 조미는 주성치와 가까워지고, 그녀의 마음에 주성치에 대한 사랑이 싹트면서 조미의 자존감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힘은 소림축구팀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서 패배할 위기에 처했을 때, 조미로 하여금 골키퍼로 나타나 경기의 판도를 뒤집어 버리는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 주게 만든다.
조미로 인해 주성치도 달라진다. 조미가 조심스럽게 꺼내 보인 마음 앞에서 어색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던 주성치는, 조미의 눈물 젖은 만두를 먹고서야 사랑을 깨닫는다. 흘린 눈물이 반죽에 들어가 맛이 다 변해 버린 만두에서 진심을 찾은 것이다. 주성치의 후기 작품 중에서는 사랑이 주성치를 감화시키는 설정을 자주 찾을 수 있다. <소림축구>의 조미는 주성치에 대한 사랑을 투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인물이다.
주성치 영화 속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특히 주성치가 연출에 참여한 순간부터 주성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눈에 띄게 변화했다. 이 글에서는 이를 비교하기 위해 주성치가 연출을 맡은 작품이 아닌 <가유희사>와 <파괴지왕>, 주성치가 연출을 맡은 작품인 <식신>과 <소림축구>를 대상으로 삼았다.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주성치 영화가 그려내는 사랑의 모습이 변화하는 데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힘으로 누군가를 바꾸어 놓는다는 설정은 주성치 영화 속에서 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향하는 설정이었다. 독특한 여성 캐릭터 막문위를 내세운 <식신>의 여성관 역시도 그리 발전적인 부분은 없다. <식신>의 막문위는 주성치의 동업자지만 동시에 주성치를 바꾸어 놓는 여성으로서의 존재가 더욱 부각된다. 막문위가 영화 막바지 ‘얼굴이 예뻐진 채’ 등장하여 수줍게 웃는 모습에서 우리는 <파괴지왕>의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소림축구>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조미와 주성치는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은 비교적 수평적 관계에 있다.
사랑의 관점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하는 선택과 행동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 선택은 남성 인물보다 대담하며 용감하게 그려진다. 조미 역시 극 후반부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골키퍼로 용감하게 나서는 선택을 한다. 특히 주성치 후기 작품들 속 여성 캐릭터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능동적인 존재다.
다만 사랑을 벗어나서 여성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고 주도할 수 있는가에 관한 논의는 주성치의 기존 작품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감독으로서 제작한 작품 <신희극지왕(2019)>에서는 기존 작품들보다 더 뚜렷한 방식으로 여성의 주도성이 드러난다. <신희극지왕>은 <희극지왕(1999)>에서 주성치 본인이 연기했던 ‘천구’라는 인물을 여성으로 전환함으로써 재탄생시킨 이야기다. 주인공은 더는 사랑을 찾아나서는 인물이나 사랑으로 남성을 바꾸어 놓는 존재가 아니다. 꿈을 좇는 인물이다. 이는 영화의 성별을 반전시켜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를 넘어서서, 새 시대의 배우의 얼굴로 여성을 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