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북경특급> <홍콩 마스크> <서유쌍기>
주성치 영화에 무수히 녹아 있는 패러디(parody)는 이미 나와 있는 다른 창작물의 어떤 부분을 가져와 자신의 작품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물에 등장한 설정이나 상황, 장면 등을 그대로 모방하여 작품을 구성할 수도 있지만 창작자의 입맛에 맞게 변용하는 것 또한 패러디의 영역이다. 즉, 텍스트를 모방하고 (재)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패러디가 가능해진다. 패러디는 하나의 텍스트가 문화 속에서 구성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활용하는 과정이며 이를 토대로 새로운 해석과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어디까지를 패러디로 볼 것인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부분은 기존 텍스트를 ‘재치 있게’ 활용한 정도를 패러디라고 일컫는다. 패러디한 장면을 보고 기존의 텍스트가 무엇인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사실로부터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패러디에 가깝다. 기존의 텍스트를 패러디했다는 사실마저도 독자에게 어떠한 감상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A가 B를 패러디한 것이 재미있고 신선하다거나, 어울린다거나,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잘 된 패러디의 예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성치 영화는 패러디를 매우 잘 활용한 편에 속한다. 플롯이나 설정, 대사의 일부를 가져와서 자신의 영화에 어울리게 변용하거나 웃음을 줄 요량으로 사용하면서도 어색함이 없다. 주성치 영화 속 패러디는 기존 텍스트를 떠올리는 과정에서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정도일 뿐, 작품을 해치지 않는다.
<007 북경특급(1994)>은 <007> 시리즈의 대략적인 설정만 가져왔을 뿐, 홍콩의 007은 화려하거나 멋있는 액션을 펼치는 요원이 아니다. 007이 띄우는 승부수는 터무니없고 괴상한 발명품들이다. 007은 총알이 뒤로 발사되는 청개구리 총,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는 용수철 달린 가방을 선보이면서 원영의와 관객 모두에게 당혹스러움을 안겨 준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요원처럼 그려지지만,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실력 있는 ‘칼잡이’로서 악당을 물리칠 줄 알며, 원영의가 사실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당신을 만난 적 없는 셈 치겠소”라며 유유히 떠나 버리는 쿨한 모습까지 보인다.
사실 <007 북경특급 2>의 주성치는 요원도 아니다. 물론 원제를 살펴보면 대내밀탐령령발(大內密探零零發)로, 주성치는 00발(008) 역할을 맡았다. 영화의 00발은 황제의 호위무사다. 기발하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발명품으로 황제의 속을 뒤집어 놓지만, 결국은 이 발명품으로 황제를 지키는 재치를 보인다.
<007 북경특급 2>는 <007> 시리즈와는 별다른 관련도 없고, 전작으로 여겨지는 <007 북경특급>과도 특별히 이어지는 지점은 없다. 물론 영화 시작 부분에 007 테마 음악을 변주하여 틀어 주는 재치는 잊지 않는다.
신체 일부가 다른 물건으로 바뀌거나 훼손되는 등 괴상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홍콩 마스크(1995)>는 주성치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그로테스크한 성격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제목과 포스터에서 짐 캐리의 <마스크>를 연상하게 만들지만, 영화의 플롯과 소재를 따져보았을 때 <마스크>보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이나 미국드라마 <육백만 불의 사나이>를 연상시킨다. (물론 <홍콩 마스크>라는 제목은 한국 개봉 당시 수입사가 붙인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주성치가 파티장에서 검은 단발머리에 흰 셔츠를 입은 여성과 춤을 추는 장면부터 <펄프 픽션>의 그 유명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물론 위험한 부위에 마약 주사를 맞는 장면 등은 <펄프 픽션>에는 없는, 주성치의 익살이 만든 결과다. 그러나 <펄프 픽션> 패러디는 딱 거기까지다. 주성치가 마피아의 폭탄을 맞고 죽어 버린 것이다. 주성치를 가르치던 박사가 사지가 절단된 주성치를 재조립하며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유명 할리웃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인기를 끌었던 홍콩 영화를 패러디한 경우도 많다. <서유쌍기(1994)>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1993)>의 명대사를 입맛대로 바꾸어 활용했다. <중경삼림>의 금성무는 임청하와의 기억을 되짚으며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해야겠다”라고 말한다. 임청하에게 생일을 축하받았던 그날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의미다.
주성치는 같은 대사를 아주 다른 상황에서 읊는다. 긴고아를 쓰고 손오공으로 거듭나기 전, 속세의 연과 정을 모두 끊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혼자서 읊조리는 후회이자 고백이며, 반성인 것이다. 주성치의 독백에 가까운 “만약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사랑한다 말하겠소. 기한을 정하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는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을 때 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하는 지존보의 가장 진실한 고백이다.
주성치 영화 속 패러디는 대개 영리하게 사용된 패러디다. 홍콩 내외로 인기를 끈 유명한 작품에서 특징적인 장면이나 대사 등을 따와 이를 과장하거나, 기존 텍스트와는 다른 상황에 갖다 붙이는 등 적절한 모방과 변용 전략을 펼쳐 재미를 살리면서도 플롯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 텍스트를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며, 때로는 기존 텍스트보다 더한 감동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처럼 주성치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패러디는 영화적 재미를 부각하는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