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득하게 붙어있는 기억들
그녀의 이야기
“내가 얘기 좀 하면, 듣고 그냥,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게 맞아요. 아주 힘드셨죠.’라고 얘기해 주면 안 되겠니?”
내가 잘 아는 70대의 여성이 있다. 그녀는 강원도 철원의 한의원 집 둘째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단다. 만약 옛날의 세라복을 입은 깍쟁이 여중생을 상상한다면, 그녀의 어린 학생 시절의 모습이 정확히 들어맞을 것 같은 그런 여성이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공부까지 잘했으면 그 집에서 특히나 이뻐했을 딸이었을 것이다. 둘째들이 늘 그렇듯, 위, 아래 사이에 끼어 있으면 눈치도 꽤 빨랐을 것 같다.
보통 언니랑 싸우면 ‘너는 왜 언니한테 대드냐?’고 혼나고, 동생이랑 싸우면 ‘왜 동생 못살게 구냐?’고 혼나는 그런 둘째들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엄마와 지내던 중 아버지마저 중학교 때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때 한의원의 수제자 중 하나가 집문서, 땅문서 등을 가지고 도망가 버려서 그녀의 다섯 남매는 길거리에 나앉았단다. 새엄마도 더 이상 아이들 양육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산업현장으로 나가 먹고살아야 했으니, 그 이후의 고생은 뭐 가히 상상이 간다. 남동생들은 중동 건설 붐이 불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건설 현장에 목수와 미장일 하러 나갔다. 다섯 남매는 다들 그렇게 각자 생존을 위해 뿔뿔이 헤어졌단다.
중학교 은사의 소개로 8살 연상의 초등학교 선생님을 소개받아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책임감 강한 ‘K 장남’이었다. 그에게 동생이 세 명 있었다. 그녀가 결혼할 당시 막냇동생은 이제 10살이었고, 나머지 두 동생도 학생이었다고 한다. 남편과 둘째 사이에 여동생이 둘 더 있었는데,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장남인 남편과 시부모와의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다 보니 50대 시부모의 에너지도 젊은이 못지않았을 것이고, 언제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고부간의 갈등도 심했다고 한다.
시아버지는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한 후였는데, 퇴직금을 홀랑 다 사기당해, 판자촌에서 흙벽돌에 신문지 바른 낡은 집에 시댁 식구들과 뒤엉켜 살고 있었단다. 처음 시댁을 방문한 날 너무 놀라서 결혼한 걸 후회까지 했다고 한다. 그나마 중학교까지는 여유롭게 살았던 그녀였으니까.
결혼한 다음 해에 태어난 아들을 안고, 두 번이나 가출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술만 마시면 주사를 부렸고, 수도가 없어서 물을 길어야 하고, 화장실도 없어서 공중화장실을 어느 기간 동안 사용해야 했을 정도로 모든 게 고단한 삶이었단다. 방 두 칸에 시부모와 시동생 셋 그리고 신혼부부와 갓 태어난 아들이 엉켜 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거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을 안고 철학관을 찾아가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물어봤단다.
“이 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잘 알아줄 거고, 크게 될 아이니, 이 아이만 보고 사세요. 나중에 이 아이에게 행시나 외시를 보게 하면, 군수 자리 정도는 꿰찰 거니 이 아들만 믿어봐요.”
그녀는 아이를 안고 울면서 다시 그 시댁으로 돌아갔단다. 엄마의 눈을 올려다보는 짝짝이 눈의 아이를 바라보면서... 임신 중에 먹고 싶은 거 못 먹어서, 아이의 눈이 짝짝이가 된 것 같다고 하신다.
짝짝이 눈은 보기가 좀 그렇다. 내가 짝짝이 눈이라 잘 안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몇 년 후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남편 학교 근처에 낡은 집을 구해서 분가했다고 한다. 최악은 면한 셈이다.
분가하고 나니 들어가는 돈이 더 늘었다. 이미 남편의 벌이로는 두 집 살림은 가능하지 않았고, 맞벌이하지 않으면 시동생들 학비와 부모 부양도 불가능했단다. 코바늘, 대바늘 뜨개질, 베이비복 단추 달기 등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다 찾아서 했다. 포댓자루 두 개를 연결해 만든 큰 자루에, 뜨개질한 수출품을 가득 묶고, 본인의 키보다 훨씬 더 큰 그 짐을 손수레로 기차역까지 나르는 일이 예사였단다. 거의 왕복 6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말이다. 그 외에 더한 일도 젊은 새댁에게 늘 지워지는 짐이었으리라.
그녀의 삶에 대한 한은 그 짐처럼 커져만 갔고, 그 짝짝이 눈의 아들이 대학에 갈 무렵, 그 한은 마구 사용한 몸에 병으로 찾아왔다. 류머티즘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전전하며 수년을 앓았고, 지금도 완쾌한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믿었던 아들은 행시랑 외시를 볼 생각도 없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문과 대신 이과를 선택했다. 그나마 공부는 잘했다고 하니 다행인데, 조금이라도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마어마하게 혼을 냈었다고 하니 그 덕도 있었나 보다.
아들을 대학 보내기 전에 시동생들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시동생 둘 결혼까지 시켰다. 막내 시동생은 소아마비 환자였는데, 대학교 보내주지 않는다고 쫓아와 난리를 칠 때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공부나 잘했으면 그게 아까워 빛이라도 내서 가르쳤을 텐데, 막내 시동생은 공부를 잘 못했단다.
난 늘 이런 막내들을 좀 싫어하는 편이다. 나도 장남이거든.
소아마비 늦둥이를 둔 시부모는 그 아이를 끼고돌면서 장남만 바라봤는데, 그 장남도 속이 새까맣게 타다 못해 하얀 재만 남았을 것 같다. 그러다 시누이가 백혈병으로 먼저 세상을 뜨고, 그 장례도 치르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단다. 당신 딸 아픈 거를 며느리 탓하며 화를 풀었을 시어머니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우리나라 장남들과 맏며느리들에겐 정말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한다.
갱년기가 온 시점쯤부터 그녀의 우울증이나 분노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즈음부터 매일 남편에게 자기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고 푸념했고, 치매로 마지막까지 괴롭히던 시부모님들이 세상을 모두 떠난 후까지 그 푸념은 계속되었다. 딸이나 아들에게 매일 전화해서 푸념하면 그녀의 아들과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린 듯 짜증을 냈다고 한다.
남편도 듣다 지쳤고, 그 지친 남편에 대한 원망까지 푸념에 더해졌으며, 그녀의 원망은 그간의 시댁 식구에 대한 분노, 가난에 대한 진절머리, 본인 삶에 대한 보상 심리 등으로 견고해졌다. 그나마 며느리가 매일 한 시간 가까이 그 푸념을 들어주었다고 하니, 며느리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정말 대단한 며느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은 더 이상 푸념을 하지 않으신단다.
그녀는 자신이 받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는데, 아마 그리 돌려받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말수가 적은 남편과 이야기하기 싫어, 동네 사람들이나 지인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음식솜씨도 참 좋아서 뭘 해서 나눠주길 좋아하신단다. 그녀의 아들이 방문할 때마다 뭔가 음식을 해서 싸주려고 하면 그 아들은 늘 받아 가지 않았다. 맞벌이하다 보니 집에서 밥 먹는 때가 별로 없고, 못 먹고 버릴 때가 많다고 했다. 한사코 마다하는 아들이 매번 서운하지만, 또다시 음식을 준비하신단다. 그 아들놈은 참 못됐다. 다만, 뭐든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니, 주변 사람들도 좀 질려하는 경우가 있던 것 같다.
늘 외로움에 시달리는 그녀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 듯했다.
“사람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라지 마세요. 기대하는 만큼 실망도 큽니다. 그게 남편이든 자식이든 그들도 원하시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들도 그들의 삶과 생각이 있거든요. 본인은 바뀌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남들이 나를 위해 변화하길 바라시는 건 맞지 않는 겁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면, “알아요.” 하시지만, 끝내 동의를 안 하신다.
내가 그 아들과 남편분을 잘 아는데, 성격적으로 잘 견뎌내지 못한다. 거기다 아들은 그 어머니의 성격을 똑 닮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중간에 끼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짜증도 많이 냈단다.
늘 서운함에 지칠 때마다 보상받으려는 본인의 의지를 더 키우는 것 같았다. 고생에 대한 보상 심리가 점점 더 그녀를 괴롭힌다는 걸 본인도 아시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고집은 더 세지고, 견고해졌다. 그나마 똑똑한 분이라 조절도 잘하시지만, 가끔 가시 돋친 이야기로 주변을 힘들게 하시기도 한다. 그 가시에 찔린 이들은 움찔거리며 괴로워했다.
아마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 시대에 그리 고생하시면서 마음의 병을 많이 얻으신 것 같다. 마음의 상처는 잘 아물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치유가 더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처럼 정말 고생도 많이 하고, 헌신한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런 시대였다고,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이야기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남들보다 더한 고통의 나날들을 보낸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을지 도통 잘 모르겠다. 그녀가 쏟아 놓은 원망을 다 들어주고 공감한다고 해도, 그녀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얼마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다 지난 일이니 훌훌 털어 버리시라고, 지금은 자식들 잘 키우고 여기까지 오셨으니 잘하셨다고, 이젠 건강 잘 지키시며 재미있는 일 많이 하시라는 말씀밖엔 못 드리겠다.
그녀는 수년 전부터 붓글씨와 한국화를 열심히 하신단다. 한지 위에 쓰인 그녀의 글씨나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감탄하기도 한단다. 친지나 자식들에게도 족자로 제작해서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솜씨가 참 좋으신 분이다. 이걸 하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신 건지, 꽤나 부드러워졌고, 말씀도 여유로워졌다.
한두 해 지나면 팔순인 그녀의 마음에 좀 더 여유가 생기고, 그 한이 훌훌 다 빠져나가길 바란다. 나이가 들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지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녀의 아들도 좀 더 잘해드리려고 노력하길 바란다.
그녀가 붓으로 난초를 친 족자가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다.
매일 보면서도 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전화드려서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오늘은 날씨가 더 차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들이 늘 제대로 해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눈물이 나서 더는 못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