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득하게 붙어 있는 기억들
Die Hard
“선생님, 요 옆의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고3 때 영화 <다이하드>가 개봉했고, 몇몇은 재미있다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학교에서 떠들어댔다. 그때까진 브루스 윌리스의 존재를 몰랐고, 좋아하는 배우는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였다. 아직도 좋아하는 영화는 <디어헌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굿모닝 베트남>, <죽은 시인의 사회> 등이다. LA 나카토미 빌딩에서 벌어지는 뉴욕 경찰 이야기. 워낙 유명해서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영화들처럼 역시 주인공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안 죽는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Die Hard인 거지?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사람은 다르다. 누구나 죽는다. 다만 사는 동안 다이하드 한 것뿐이다. <007 No time to die> 영화에서는 절대 죽지 않는 주인공 007도 죽었다.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영원한 조커 히스 레저, <언터쳐블>, <더 록>의 숀 코너리 등 많은 배우도 세상을 떠났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세상을 떠나간다.
고2 겨울방학에 참가한 경시대회에서 알게 된 여고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토요일 저녁 시간 공공도서관에서 만나는 게 그를 볼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날은 핑계를 대고 도망 나오라고 해서, 드디어 그 영화 <다이하드>를 같이 보러 갔다.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학년주임 선생님께서 그의 50cc 스쿠터에 앉아 손짓하신다. 아까 도망 나올 때 한 놈이 ‘용석이 땡땡이치고 <다이하드> 보러 간대요.’라고 뒤에서 놀리던 걸 들으셨던 거다. 현장에서 딱 걸렸다.
선생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가서 말씀드렸다. ‘요 옆의 버스 정류장까지만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셨고, 우린 조금 떨어진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둘 다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의 상황은 영화보다 더 박진감 넘칠걸 아니까.
그때 그렇게 말씀드릴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임기응변이 좀 강한 편이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난 그 친구의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같이 타고 도망갔다.
그날 한 시간 넘게 기다렸던 학년주임 선생님의 분노는 뭐….
영화 중간에 죽을 위기를 느낀 브루스 윌리스가 경찰관 파웰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이 사랑한다고는 수없이 얘기했지만, 미안하다는 얘기는 못 했다.’라며 자기가 죽으면 자기 인사를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그때 파웰은 살아서 직접 이야기하면 더 좋겠다고 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얘기를 잘 못하는 거 같다. 미안하다고 하면 모든 게 본인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일까? 정말 미안하다는 사과를 잘 못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늘 늦는다.
브루스 윌리스가 치매로 실어증까지 앓고 있다고 한다. 이제 그의 연기를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다. 늙은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 <RED> 시리즈의 3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젠 볼 수가 없겠지? 로빈 윌리엄스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2014년 자살했다. 영화 <알라딘>에서 지니의 목소리 연기는 모든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았는데, 이젠 그도 떠난 지 오래되었다. 이제 누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려나?
1929년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영화 <날개>가 제1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2025년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까지 총 97편의 영화가 수상을 했다. 뭘 모으기 좋아하는 내 성격에 전편을 모두 모아 잘 보관하고 있다. 보관만 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다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한데, 아마 이 영화들의 주인공 중에 세상을 떠난 배우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영화만 남아서 떠난 사람을 기억하겠지.
스쿠터에 앉아서 한 시간이나 기다리셨던 학년주임께서 노환으로 고생하신다고 들었다. 죄송하다는, 정말 미안하다는 말씀을 아직도 못 드렸다. 그분과 학생들 대학 진학 방향을 다투던 젊은 고3 담임들도 이제 70이 넘은 지 오래고, 좋아하던 생물 선생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술 좋아하시던 영어 선생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다.
가끔씩 생각나는 여러 선생님, 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늘 감사하며, 많이 늦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