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대학생의 도시락
“이놈 봐라?, 데모 엄청나게 할 것 같이 생긴 놈인지?, 근데 지가 윤봉길 의사인 줄 아나 봐. 도시락 폭탄도 가지고 다니네?”
지하철 신촌역에서 공과대학 정문까지는 약 800미터 정도의 거리이고, 1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1989년 그 길은 온통 하얀색 가루가 깔려있었고, 지하철역을 나오면서부터 최루탄 냄새가 눈과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거의 100미터마다 검문검색을 했고, 매번 가방을 열어 소지품을 보여줘야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1989년 신림동에 강원학사가 새로 문을 열었고, 강원도 출신 서울 소재 대학생에게 저렴한 기숙사로 제공되었다. 비교적 부유하지 않은 학생을 대상으로 설립된 기숙사였으며, 원하는 학생에게 도시락까지 싸주어서 밥값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교내 학생 식당에서 오뎅국 한 그릇만 더 사서 먹으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침 등교할 때마다 이어진 8번의 검문에, 그 도시락까지 매번 열어서 보여주다 보니, 막상 밥 먹을 때 되면 밥에서 최루탄 냄새가 났다. 1년을 못 채우고 도시락은 안 싸서 다니는 거로 했다. 학생 식당에서 혼자 도시락 먹는 것도 어째 좀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1996년 8월 학교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전경들의 초강경 진압이 극에 달했다. 그날은 헬기까지 뜨고, 교내에 있는 학생 수보다 전경의 수가 더 많았으며, 학교 맨 안쪽에 있던 종합관까지 전경들의 토끼몰이가 심해졌다. 과학관과 종합관의 일부는 무참히 무너지고, 종합관은 불타올랐다. 그때 정문 바로 옆 건물인 공과대학 현관 강화문도 부서졌으며, 공대에 있던 나는 동기들과 옥상으로 도망갔다. 옥상에서 백양로를 달려 올라가는 전경들과 그들을 피해 달리는 교우들을 바라보며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지랄 탄과 최루탄에 학교는 온통 하얗게 변해갔고, 내 눈과 코를 막고, 그 아우성은 귀까지 막았다. 대학 시절 내내 데모와 진압은 일상이었지만, 이렇게 심한 교내 강경 진압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공대 앞 커다란 조경석에 허리를 굽히고 한 손으로 몸을 기대며 괴로워하는 과 친구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모습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아 뛰어 내려가려 했다. 그때 나를 붙잡은 건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다. 왜 그때 그 약속이 떠올랐을까?
“용석아, 대학 가서 뭘 해도 되는데, 데모만 하지 말아라. 네가 세상을 보면 불의가 난무할 거고, 네가 불의를 잘 못 참는 거 내가 키워봐서 안다. 그런데 네가 데모하면 내가 학교 선생을 계속하기가 어렵고, 네 할아버지, 할머니 부양도 어렵고, 살기 힘들어지니까…. 부탁한다.”
난 그때 아버지와 약속했다. 그래서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수업 거부, 시험 거부 해야 한다는 동기들의 외침도 무시했다.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바로 옆의 동기도 안 챙기면서 무슨 노동자, 농민? 심지어 인천의 큰 병원 아들이 뭘 안다고 진심도 없는 데모 선동을 해? 취미로? 배가 불러서 경험해 보려고?’ ‘한 시간 수업 거부하면 그 돈이 얼마고,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데?’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게 최면을 걸었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잘 지키는 아들이니까.
참 별게 다 자랑이다.
‘엎드려 괴로워하던 친구에게 뛰어 내려가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둘러업고 공대 안으로 피신을 시켜야 하나? 업을 수는 있을까? 데모했다고 나까지 잡혀가면 어떻게 하지?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물쭈물하는 동안 그 친구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아직도 그 친구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는 그날의 나의 일을 모르겠지만.
그날의 나는 참 초라하고 비겁한 놈이었다고 생각한다, 의리도 없는···.
그 친구는 현재 외국계 자산운용사의 임원이다. 얼마 전 만났더니 자기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얘기한다. 클라이언트도 젊어지니, 거기에 걸맞게 후배들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남들은 어떻게든 자기 자리 꽉 붙잡고 버티려고 하는데, 이 친구는 담백하다. 또 하나 배웠다. 그에게서 늘 뭔가 배운다.
대학교 때 만난 첫사랑이 유학을 갔다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이 먹고 결혼한 로맨티스트. 골프만 잘되면 인생의 스트레스는 없다고 하면서 늘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 그의 긍정적 자세와 담백함이 늘 멋지다. 그런데 골프 연습은 죽어도 안 한다.
가끔 학교에 갈 일이 있어 정문에 들어서면, 그때 없었던 공학원 건물 등 많은 신규 건물이 보이고, 자동차가 같이 다니던 백양로에는 대규모 지하 개발로 이젠 사람들만 다닌다. 동기들과 졸업사진을 찍었던 검게 그을린 종합관은 언제 그랬나 싶게 깨끗하다. 그때 정문도 다 파괴되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가면 예전의 아픔도, 즐거움도 다 잊힐 줄 알았는데,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서 그때의 나를 자꾸 돌아보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기억들이 도시락에 담겨 내 머릿속에 있나 보다.
나이 먹었다는 핑계로, 가족들 핑계로, 요샌 불의를 보면 잘 참는다. 비겁해지는 게 아닌지 싶어 참 씁쓸하다. 그날 친구를 위해 뛰어 내려갔었다면, 영화 ‘Il Postino’의 주인공 마리오처럼 그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다 지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