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레인 원단을 아시나요?

끈적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

by 최용석

슐레인 원단


“얘들아~ 이 새끼, 도둑놈이야~”


중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초등학교 동창 애가 나에게 뛰어와 내 점퍼를 잡아채며 소리 질렀다. 주변에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둘에게 몰려들었고, 반에서 키 작은 순서로는 5위안에 드는 나는 커다란 녀석의 힘에 몸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 ‘괜히 맞는 건 아닐까?, 내가 뭘 잘못한 게 있으려나?’ 싶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 있었다.


그 점퍼는 어머니께서 중학교 입학선물로 주신 옷이다. TV에서는 원아동복, 부르뎅아동복 같은 광고가 나오는 시절이었고, 개구리가 그려진 김민제 아동복은 정말 비싼 소위 ‘명품’이었다. 여러 가지 색상의 조각을 이은 퀼트처럼 디자인된 옷이라 이쁘고 눈에도 띄는지라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 집 형편에 이걸 살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나는 시장에서 비슷한 거 사셨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중학교까지는 애들이 금방금방 자라서 새로 산 옷이 몇 달 지나면 작아져 못 입는 경우가 많았고, 친한 엄마들끼리 그런 옷을 돌려 입히기도 했다. 그런 옷 중의 하나였던 거고 얻어 입은 옷도 여럿 있어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자기가 옷 주인이라고 소리 지르는 그 녀석의 표정과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는 수십 개의 눈들이 싫어서, ‘울 엄마가 중학교 입학선물로 사주신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놈의 옷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과 당혹감에 못 견디고 발악을 한 거다. 나를 확 자빠트린 그 녀석은 안주머니를 뒤집어 깠고, 거기에서 나타난 굵고 진한 글씨의 그 녀석 이름.


다음날 난 도둑의 누명을 벗었다. 난 도둑놈이 아니고 그냥 거지새끼인 거로.


회사 지하 1층의 양복점을 우연히 방문했다. 맞춤 양복보다는 기성복이 더 유행한 때라 그냥 사서 기장만 수선하면 되는 때였는데, 문득 한 벌 맞춰 입으면 어떨지 싶어졌다. 돈도 없으면서 호기롭게 제일 좋은 원단이 뭐냐고 물었고, 제일모직 슐레인 원단 추천에 가봉까지 했다. 워낙 고가의 원단이었지만 난 거절을 잘 못한다. 가봉을 하고, 다시 가봉을 해서 보름 후 양복을 받았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다.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은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 양복 입으면 촥 떨어진다’라며 자랑을 반복하는 양복점 주인의 말에 우쭐하며, 그 촥 떨어지는 양복만 거의 매일 입다 보니 바지 엉덩이가 다 해졌다. 양복점 주인은 ‘무슨 명품을 청바지 입듯 해?’라고 나무랐다. 명품은 늘 내구성이 없는 거 같다. 조심히 다뤄줘야 하는 물건인 거다.


그때도 그랬지만 슐레인이라는 국산 원단을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그냥 휴고보스네 제냐니 하는 수입 명품의 브랜드를 이야기하고, 원단 조금 알면 로로피아나를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냥 우리 때 최고는 갤럭시 아니면 할아버지들 입을 것 같은 닥스 정도였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개봉 이후 수입 명품들이 대중에게 더 알려졌고, 3초 백, 5초 백이니 하는 명품 가방도 이젠 쓰리세븐가방보다 보기 쉬워졌다. 나도 뭐 비슷한 게 한두 개 있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사실 남자들이 멋을 부릴 수 있는 게 몇 개 없다. 안경, 시계, 가방, 구두, 벨트 정도다. 개인적으로 서류 가방은 피콰드로나 요시다 포터, 투미 백이 맘에 든다. 가격이 아주 비싸지 않아서, 막 가지고 다녀도 부담 없다. 나도 돈 있으면 남들이 명품이라고 하는 비싼 거 하나 갖고도 싶긴 하지만. 글쎄.


예전 회사에서 만나 오랫동안 연락하는 팀장께서 늘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인간이 명품이어야지, 인간은 하찮으면서 겉을 명품으로 포장한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지 않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요즘 백화점에 뭘 사러 갈 때 그냥 집에서 입던 츄리닝에 티셔츠 입고 간다. 돌아다니기 편하고, 직원이 먼저 와서 말 걸지 않아서 구경도 편하다. 백화점을 잘 안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젠 뭘 갖고 싶다거나 사고 싶은 게 없어진 거 같다. 나이 든다는 게 그런 거 같다.


내가 인간 명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가끔 서로 안부를 물어주고, 일 생겼을 때 전문 의견을 주저 없이 물어봐도 기꺼이 도와주는 각 분야 전문가가 있다. 갑자기 생각나서 술 마시자고 해도 주저함이 없이 반겨주는 사람들도 있다. 이분들이 남이 뺏어갈 수 없는 나의 명품들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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