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하게 남아있는 기억들
치과의사 찬기형
“용석아, 교무실로 좀 와라~”
대학입시가 얼마 안 남은 늦가을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1층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나의 눈에 어머니가 창문 옆으로 지나가시는 모습이 들어왔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잔뜩 웅크리고 걷는 모습에 ‘엄마~“라고 부를까, 하다, 그냥 정문을 나서실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앞문이 열리며 들어오신 담임의 호출에 ‘창밖 보며 딴짓했다고 걸렸구나’ 싶어 쭈뼛거리는데, 이상하게도 담임 목소리가 사납지 않았다. 그땐 공부 잘하는 애들은 잘 혼나지 않으니까.
그 당시 교무실은 너구리를 잡는 듯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명문대 원서 많이 써야 학교가 산다고 계속 담임들을 몰아가는 학년주임과, 그래도 애들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들이대는 젊은 담임들의 아우성이 담배 연기보다 더 지독했었다. 그래도 그날은 이미 원서 쓸 놈은 거의 다 쓴 마무리 단계라 비교적 조용했고, 학년 교무실은 피로에 전 담임들과 부담임들의 쉬는 시간 같았다.
“좀 전에 어머니께서 다녀가셨어. 치대는 돈이 없어서 못 가르치시니, 아들 좀 설득해서 다른 데로 원서를 바꿔 써달라고 하시더라고. 직접은 말씀 못 하시겠다고. 네가 2 지망으로 사범대를 썼으니까, 사범대로 바꾸면 어떨까?” 담임의 말씀에 순간 난 멍했다. 주변에 앉아계시는 선생님들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적막감에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떨구며 담임께 말씀드렸다. “나중에 제가 학교 선생님이 되면, 아들이 똑같이 의대나 치대 간다고 하면, 돈이 없어서 못 가르친다고 해야 하나요?”, “요새 제일 돈 많이 버는 과는 어디일까요? 거기로 갈게요.” 그 말로 서울대 치대는 끝났다.
어려서부터 아토피가 심해서 친구들에게 문둥이 소리 들으며 많은 놀림을 당했다. 얼굴과 몸엔 늘 긁어 생긴 상처와 피딱지가 그득했고, 어디서 들은 소록도 얘기에 의사가 돼서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그땐 그랬다. 의사는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하는 거라고 배웠고, 위인전과 도덕책에 쓰여 있어서 달달 외우며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들였으니까. 서울대 의대에 갈 실력이 되지 않았다. 서울대 치대는 그나마 안정적으로 갈 수 있었다.
참 별게 다 자랑이다.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시면서 가난했던 건 그분의 잘못이 아니다. 바른 분이라 촌지가 난무할 때도 받으시는 걸 본 적도 없고, 감자 농사 잘되었다고 신문지에 대여섯 개 싸서 가지고 온 아이의 감자 선물과 제과점 아이 담임이라 종업식 때 받아온 롤케이크가 전부였다. 그런 걸 받으실 배짱도 없고 양심이 허락지 않는 분이다.
당신 부모의 무능과 여러 형제의 장남이라는 상황에서 모든 걸 감당하다 보니 정작 본인 입으로 들어갈 밥 세 끼도 다 양보하셨던 거고, 그런 상황을 옆에서 같이 감내할 수밖에 없으셨던 어머니도 딱하기 그지없었다. 부모 모시고, 동생들 교육하고, 혼례 치르고, 여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막냇동생 고등학교 졸업시키고 나니, 이제 당신들 자식 차례가 온 거고, 정말 먹고 죽을 돈도 없으셨던 거다. 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도, 선생님이라는 고귀한 직업을 대물림하고 싶었었다.
어느 날 치과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남의 누런 치아나 들여다보는 일은 난 못할 거 같다.’라며 치과의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사실 난 아토피 때문에 위생에 지나치게 예민했고, 비위도 약해 이상하거나 더러운 걸 잘 못 보는 놈이었으니까. 나중에 치대 진학을 포기하게 시킨 게 미안하셔서 그냥 마음에도 없던 이야기를 하신 거라고 했다. 진심이 아니셨다고. 계속 마음에 남으셨던가 보다
얼마 전 고교 선배이자 연세대 치대 졸업한 치과의사 선배가 돌아가셨다. 우리 가족들의 치아는 그 형이 다 고쳐주셨고,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으셨다. 환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진심이 너무 뛰어나서 단골도 참 많았던 형이다. 그의 여러 개인적인 아픔과 사정은 내가 이해 못 하는 부분도 많지만, 그는 최고의 치과의사였다. 난 그리 못했을 거 같다.
마음이 먹먹해서 장례식도 가보지 못한 내가 너무나 초라하고 미안한데, 그가 심어놓고 자랑하셨던 그의 명작 임플란트 한 개가 가끔 내 몸과 마음을 툭툭 치면서 그처럼 웃는다.
형님,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