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속의 왈츠
4월의 끝자락,
푸르른 빛이 제주의 골목마다 번져 있었다.
그날도 봄비가 내렸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초록잎 위로 떨어질 때마다,
마음이 묘하게 설레었다.
출근길, 흙냄새가 스며든 공기 속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이런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내 사무실은 제주시내 호텔로 옮겨졌다.
K항공을 비롯한 국내 항공사 숙박 제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공사 직원과 승객들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하는 시스템이었다.
수익보다 예약률 100%를 목표로 두었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카지노와 다른 호텔들로 연결됐다.
외국인 전용 카지노 버스가 매일 운행되면서,
때로는 호텔 네 곳의 수입을 합친 것보다 카지노 수입이 많을 때도 있었다.
도박이란 게, 참 무섭고도 매혹적인 세상이었다.
호텔 유튜브 채널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영어까지 다국어 방송을 주 3회 업로드하고, 쇼츠는 주 5회 올라간다.
구독자는 천만 명을 넘어섰다.
전문 직원 7명, 모델들은 대부분 스물다섯 전후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수익은 내 통장으로 들어오고,
나는 그 돈을 다시 팀원들과 모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루가 분주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날 오전 10시,
미팅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자 빗방울이 유리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아, 맞다.’
왈츠 학원 원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증여받은 4층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1층 커피숍에서 만나자, 원장이 반가운 미소로 나를 맞았다.
“오늘은 오전엔 여기서 일해요.
남편은 한의사라 저보다 더 바뻐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근처 초밥집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식사 후, 나는 원장이 선물해준 댄스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대회에서 입던 옷이라며 직접 골라준 것이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었다.
“한 번 해볼까요?”
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음악이 흐르고, 우리는 천천히 왈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의 단단한 허리 힘이 전해져 왔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빗소리와 박자만이 존재했다.
그 30분은 짧았지만, 마음이 완전히 비워지는 시간이었다.
이게 바로 힐링, 아니 — 작은 행복이었다.
춤이 끝나자, 원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학원을 정리하려고요. 강사로 들어가서 일하려 해요.”
“그래요? 아쉽네요.”
“새로 오픈하는 학원은 두 배는 커요. 오늘이 여기서 마지막 수업이에요.”
그녀는 담담했지만, 나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
“개업하면 첫 수강생은 내가 될게요.”
그녀는 웃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슬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딱 좋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골프장으로 향했다.
클럽하우스에 내리자 푸른 잔디가 비에 젖어 반짝였다.
비를 맞으며 스윙을 하는 여성 골퍼들이 눈에 들어왔다.
“굿샷!”
내 외침에 네 명의 여성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최상희 회장님 아니세요?”
“하하, 실례가 안 된다면 카트 타고 같이 구경해도 될까요?”
그녀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비가 그치고, 우의를 벗은 그들은 모두 늘씬했다.
캐디 둘은 20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몇 살이에요?”
“스물여덟입니다. 근처에 살아요.”
“그래요, 참 성실하네요.”
2시간쯤 라운딩을 마치고, 그늘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누었다.
그들은 K항공사 승무원들이었다.
휴가를 내고 3박 4일 일정으로 골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저녁엔 뭐 드세요?”
“아직 정한 게 없어요.”
“그럼 제가 대접할게요. 호텔 레스토랑에서요.”
저녁 7시,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총괄본부장과 은정도 함께였다.
스테이크와 와인,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회장님, 피부가 너무 좋으세요.”
“하하, 나도 이젠 늙었어.”
와인 두 병을 마신후 , 발렌타인 21년산이 테이블에 올랐다.
여자 일곱 명의 수다는 밤까지 이어졌다.
결국 9시가 넘어 제주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춤, 음악, 술, 웃음.
그날 밤은 완벽한 해방이었다.
자정을 넘겨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창밖에는 다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이 흘렀다.
오늘은 왈츠 학원 개업식 날이다.
팀장에게 큰 화분 하나를 보내라고 말했다.
왈츠 선생이 “12시에 식사 같이 해요”라며 초대했다.
11시 40분, 학원에 도착하니 새 건물 2층이었다.
샤워실, 락커룸, 모두 현대식이었다.
새 원장 부부는 서른 살 동갑내기 프로댄서이다.
정말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다.
돼지머리 앞에 봉투를 올려놓고, 인사를 마쳤다.
초청 손님은 나와 경호원, 그리고 서울에서 온 프로선수 몇 명뿐이었다.
제주에는 아직 인연이 적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시전문 학원답게 수강료도 높았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제안했다.
“우리 유튜브에 한 번 출연해 보실래요?”
부부는 기쁜 듯 말했다.
“그럼요, 영광이죠!”
2시, 호텔 유튜브 팀이 도착했다.
댄스복이 없어, 부인의 의상을 빌려 입었다.
원장과 내가 한 곡, 원장 부부가 한 곡, 그리고 왈츠 선생과 원장이 마지막 곡을 췄다.
총 세 곡, 13분이다.
영상은 ‘제주 라틴댄스 입시전문’ 자막과 함께 마무리됐다.
춤이 끝나자, 모두가 숨을 고르며 웃었다.
밖에서는 또다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등록서를 작성했다.
첫 번째 수강생이었다.
“회장님이 첫 회원이에요.”
그녀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 따뜻한 손끝에서 묘한 기운이 전해졌다.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에게 봉투를 건넸다.
“오늘 고생 많았어. 식사 맛있게 해.”
그들의 환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집에 돌아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오늘 춤을 너무 많이 췄다.
세 명과 번갈아 가며 두 시간 넘게 춤을 추었더니 온몸이 녹초였다.
샤워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그때 팀장 부인이 다가왔다.
“회장님, 영상 나왔어요. 너무 예쁘게 나왔어요.”
그녀가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제주 라틴댄스 입시전문〉
영상은 한 시간 만에 조회수 100만을 돌파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반응이 장난 아닌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도 수백 개예요. 회장님 춤 너무 멋지다고요.”
그날 밤, 팀장 부부와 경호원들과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거릴 때마다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술기운이 오르자 모두들 웃음이 터졌고,
그렇게 시계는 어느새 10시를 가리켰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눈을 뜨자 가장 먼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믿기 힘든 숫자가 떠 있었다.
조회수 1천만이다.
최근 들어 최고 기록이었다.
‘이럴 수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왈츠 학원은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고 한다.
팀장 부인과 나는 아침 산책을 나갔다.
비가 그친 하늘 아래, 젖은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부드럽게 스쳤다.
그녀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회장님, 진짜 자매 같아요.”
우리는 그렇게 웃으며 마을길을 걸었다.
8시에 아침을 먹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잠시 주식 차트를 보다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멈춘 제주도, 오늘은 왈츠의 날이겠군.’
점심은 근처 국밥집에서 시래기국밥 한 그릇으로 간단히 때웠다.
총괄과 은정이는 여전히 바빴다.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왈츠 학원으로 향하니, 오후 1시 반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원장 부부가 달려와 내 손을 붙잡았다.
“회장님, 정말 감사해요. 오전에 입시생 여덟 명이 등록했어요!”
그들의 눈빛에는 흥분과 감사가 섞여 있었다.
“그럼, 기념으로 우리 한 곡 춰요.”
남편 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음악이 흐르자, 나는 그와 함께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부드럽고 힘 있는 리드에 몸이 따라갔다.
“이 기분… 선녀가 된 것 같네요.”
그가 웃었다.
그날 학원에는 스무 명이 넘는 입시 준비생이 새로 등록했다.
보통 한 달에 200만 원이지만, 개업 행사로 150만 원에 받았다고 했다.
왈츠선생과도 30분 넘게 함께 춤을 췄다.
숨이 차오를수록 마음은 더 가벼워졌다.
“프로 친구도 여기서 강사로 남기로 했어요.”
왈츠선생이 말했다.
“학생이 많아서요. 20 명도 벅차다는데, 30 명까지는 무리라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의 내 얼굴에는 피곤함 대신 붉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왈츠의 선율이 다시 귓가를 스쳤다.
‘그래, 이게 사는 거지.’
그날 밤,
최상희는 다시 한 번 춤바람이 난 아줌마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봄비가 내린 제주에서, 그 왈츠는 단순한 춤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가게 하는 작은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