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가는 사랑
장마가 길다.
며칠째 내리는 비가, 이상하게도 요즘은 좋다.
옷차림은 점점 가벼워졌다.
여름이라 미니스커트에 나시 차림, 머리는 더워서 높이 묶었다.
지난번 시장에서 만 원 주고 산 빨간 샌들이 오늘따라 눈에 띈다.
악세사리는 귀걸이 하나뿐이다.
단정하면서도 조금은 외로워 보이는, 그런 여름이다.
요즘은 왈츠를 프로에게 배운다. 개인 레슨으로 하루 한 시간씩이다.
학원엔 입시생만 마감 40명, 그리고 성인 취미반이 열 명쯤 된다.
저녁엔 늘 사람들이 몰리고, 주간은 비교적 한가하다.
선생님은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가 가장 바쁘다고 했다.
나에겐 그 시간이 하루의 하이라이트다.
레슨이 끝나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도 조금은 고요해진다.
오후 네 시쯤이면 클럽하우스에서 차 한 잔을 마신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골프인들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힐링된다.
그렇게 하루가 천천히 흘러간다.
요즘엔 또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운영 중인 호텔이 네 개이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참 묘해서, 더 욕심이 난다.
부산이나 서울에 또 하나, 아니면 둘 다 오픈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돈이 목적은 아니다.
단지, 확장하고 싶은 열망이 자라난다.
사실 지금 가진 자금이면 항공사도 인수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란 게 참 제어가 안 된다.
한번 꽂히면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 그런 생각들로 하루를 흘려보낸다.
며칠 전, 총괄이 말했다.
“회장님 호텔을, 대기업에서 인수 의사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팔면 난 뭐하지? 쉬는 게 더 힘들어.”
그냥 단번에 거절했다.
그날도 장대비가 내렸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사람들이 홀아웃하며 흩어졌다.
혼자 식당에 앉아 미역국에 소주 한 잔을 곁들였다.
비 오는 날의 술맛은, 이상하게 더 깊다.
총괄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근 언제 해?”
“곧이요. 술 생각나세요?”
“응, 골프장으로 와.”
저녁 여섯 시 반, 총괄이 도착했다.
경호원들은 모두 퇴근시키고, 단둘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제일 맛있는 참치집으로 향했다.
룸에 들어가 참치 머리 좋은 걸로 주문하고, 사케를 곁들였다.
오랜만에 참치를 먹으니 입안이 행복했다.
그녀도 나도 혼자 산다.
총괄의 아이들은 모두 서울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둘 다 과부, 둘 다 외롭고, 어쩌면 서로에게 닮은 구석이 많았다.
참치를 서로 먹여주며 웃었고, 어쩐지 연인 같은 공기가 흘렀다.
그날 밤, 노래방에 들렀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청했다.
초록색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자,
땀이 묻은 체온이 느껴졌다.
눈을 마주치자 사슴 같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유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우린 그렇게 첫 키스를 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녀의 침대였다.
총괄은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같이 샤워를 하고, 누룽지로 아침을 먹었다.
총괄은 집까지 데려다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조용했고, 서로가 지난밤을 꺼내지 않았다.
며칠 후, 은정이가 결혼했다.
경찰대 출신의 이혼남과 1년 연애 끝에 대구로 시집갔다.
펜션에서 시작해 지금의 호텔까지 함께 달려온 나의 첫 동료였다.
그녀의 결혼이 진심으로 축하스러웠지만,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제주의 첫 친구였고, 마음의 버팀목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 며칠간은 공허했다.
그 즈음, 총괄이 말했다.
“회장님, 참치머리에 사케 한잔 하실래요?”
“그래, 그러자.”
9월 하순, 가을의 초입이었다.
그날도 경호원들을 돌려보내고 단둘이 참치집에 앉았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미니스커트 위로 드러난 하얀 다리가 눈부셨다.
사케잔을 채워주며 그녀가 웃었다.
“한잔 하세요.”
술을 삼키자, 참치 한 점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저… 회장님 사랑해요.”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것도 버거웠다.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다시 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우리는 두 번째 키스를 나눴다.
서귀포의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녀의 손이 내 허벅지 위에 닿았을 때, 나는 말했다.
“우리… 같이 살까?”
그녀는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나를 안았다.
그 뜨거운 포옹 속에서, 세상이 잠시 멈췄다.
그날 밤이,
우리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