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28살 그날의 빗소리(마지막회)

#용서받지 못해도 사랑받고 싶었다

by 전태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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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술 두 병을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잠이 들었다.
어젯밤, 두 여인이 떠나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렸다.



사실을 알았으니 그 남자를 떠나보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걸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린 두 여자에게 그런 끔찍한 부탁을 한 내가 용서가 안되었다,
정말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들에게 그런 짐을 지우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셋 모두의 영혼에, 이렇게 깊은 상처가 남을 줄은 미처 몰랐다.


모든 걸 잊고 싶었다.
그저 멀리 떠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었다.
나는 전라북도로 향했다. 옥정호로 가는 길이다.
차를 몰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 그 남자는 사기꾼이었다.
내가 100억을 준다고 했다면, 그가 나를 속일 생각을 했을까?



결국, 나는 돈이 아까워서 그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정답없는 생각들을 하다보니 호수가 보였다.

저녁 무렵, 핸드폰오빠의 펜션 앞에 도착했다.



간판도, 건물도 예전 그대로였다.
리모델링조차 하지 않아, 시간의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누가 운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현관문이 열리고, 노부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누나 부부였다.
그들도 나를 알아보고, 누나는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저녁상이 차려졌다.
“결혼은 했니?”
“아니요. 아직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의 재산은 누나도 몰랐다고 했다.
식당 정리와 건물 매각 후 남은 돈, 통장에 38억이 있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뒤, 그 재산은 누나에게 상속되었다.



부부는 지금까지 펜션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봉투를 내밀었다.
“저 여기서 한 달쯤 묵고 싶어요. 밥값은 내야죠.”
누나는 봉투를 밀어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음 편해지면, 그때 떠나거라.”
누나가 봉투를 가방 속에 넣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렀다.
눈 내리는 임실의 겨울, 옥정호는 숨이 멎을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시골의 시간은 내 마음을 조금씩 덮어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결심했다.



골프장 사장은 총각 봉남에게 넘겼다.
내가 살던 골프장앞 주택은 그에게 주었다.
딸은 병원 원무과 직원과 함께 봉남을 골프장으로 보냈다.
골프장은 병원 자회사로, 딸이 관리한다.



그리고 나는 가진 전 재산, 거의 5조에 달하는 돈을 국가에 기부했다.
신용카드도 없앴다.



이제는 이 펜션의 식구로 살기로 했다.
아침이면 마당을 쓸고, 개에게 밥을 주고,
어제 남은 반찬으로 누나 부부와 아침을 먹었다.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늦은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8년후....



이제는 늙었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산속에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기와 걷기뿐이다.



그것이 내 하루의 낙이다.

핸드폰오빠의 누나는 5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 남편은 1년 뒤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혼자서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
예약이 있을 때만 방을 내주고, 없으면 혼자 지낸다.



앞마당 300평 텃밭을 일구며 산다.
딸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찾아와 하룻밤 묵고 간다.
예전의 총각 베트남 부부는 이제 아이 둘을 키우며,
한 달에 한 번씩 들러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등을 건넨다.


그들의 얼굴엔 늘 감사가 묻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나는 이제 욕심도, 집착도 없다.



그저 때가 되면 죽음을 받아들일 뿐이다.



내 인생의 반은 충분히 행복했다.


봄이면 밭일로 분주하고, 여름이면 풀과 싸우며,
가을이면 수확으로 바쁘다.



늦가을 저녁, 밭일을 마치고 샤워를 한 뒤
테라스에서 혼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려 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오랜만에 화장을 했다.
하얀 셔츠 블라우스와 미니스커트,
딸이 선물한 빨간 레이스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었다.



젊은이들의 속옷이라 미뤄두었던 그것을,
오늘은 꺼내 입었다.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넣고 거울을 보았다.



아직 맑은 얼굴, 여전히 날씬한 몸매이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가 수의를 입었다는 기분이 든다.



1층 테라스로 내려가니 가을비가 세차게 내렸다.
바람은 잠잠했고, 빗소리만이 귓가를 채웠다.
“죽기 참 좋은 날이네.”
어느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빗소리와 함께 홀로 마시는 술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 저녁 8시가 넘었을 무렵이었다.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펜션 마당으로 들어왔다.



차 안에서 한참을 나를 바라보는 듯하더니,
비에 젖은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내렸다.



그는 절의 스님이다.
8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온 것이다.



비를 맞으며, 그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아마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나를 얼마나 원망하며 살았을까.?
어쩌면 나는, 그의 손에 죽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허리 뒤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비에 젖은 채 내 앞에 멈춰 섰다.



얼굴 위로, 모자 끝으로 빗물이 흘렀다.


“나 죽이러 왔니?”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한잔해.”



내 잔을 비우고,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오늘 화장하길 잘했다.
예쁜 옷을 입길 잘했다.

왜냐면
오늘이, 내가 죽기 딱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가 입에 물 붙듯이 소주를 마셨다.


빗소리는 더욱 깊어졌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불빛이 어둠 속에서 잠시 흔들렸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담배를 건넸다.

“오늘따라 담배 맛이 참 좋네.”
그는 말이 없었다.



시간이 멎은 듯한 적막 속에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오래된 바람이 숨어 있었다.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사랑해줄래?”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끝까지 빨아들이더니,
젖은 바닥에 던졌다.



불빛이 꺼지며, 연기 한 줄기가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추었다.
그 순간 세상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남자는 나의 손목을 잡고,

침대에 나를 내동댕이 쳤다.


그리고 그 불은 오래된 죄의 심장을 태웠다.
고통처럼, 구원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그 품 안에서 나는 오랜 세월의 죄를 던지고,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느꼈다.


마침내,

그는 절망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쇠붙이의 빛이 순간 번뜩였다.

날카로운 칼이였다.


나의 뱃속 깊이, 몇번이고 들락거렸다.

짧은 숨이 목울대를 타고 올랐고,
붉은 피가 흰 시트를 물들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피가 흐르는 배를 움켜쥐고,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한 줄기 흘러, 빗물처럼 뺨을 타고 내렸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피비린내와 빗소리, 그리고 절규가 뒤섞인 밤이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엔진 소리가 터지고,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호수를 향해 날아올랐다.



한 줄기 불빛이 어둠 속으로,
그리고 물 위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비는 멈추지 않았다.



세상은 다시 고요했다.


남은 것은,

비와 침대시트와 바닥에 흐르는 피,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사랑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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