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1
봄이 지나고, 여름의 열기도 물러가고,
어느새 가을의 첫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알았다.
서울로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말이다.
명동에 30층 건물의 매입 절차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고,
일산의 땅들은 신도시 열풍을 타고 모두 팔려나갔다.
천억에 사들였던 그 땅은 어느새 2조 가까운 가치를 품게 되었고,
그 사이에도 나는 또 다른 땅을 사 모았다.
일산, 분당의 효과가 엄청 난것이다.
남산 근처의 천평 넘는 집 한 채는 새 삶의 기점이 될 예정이었다.
정치인, 기업인들이 사는 동네라 그런지 고요함 속에서도 묵직한 기운이 흐르는 곳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지방의 15층 건물은 2천억에, 7층짜리 건물은 70십억에 각각 매각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오래 함께해온 최실장 부부를 불렀다.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같이 갑시다.
앞으로 3년만 나와 함께 일해주세요. 급여는 그대로 드릴 테니… 이 집을 드리겠습니다.”
현 시세로 20억이 훌쩍 넘는 집이었다.
3년 동안 자리만 잡아주면 된다고,
그 기간만 내 곁을 지켜달라고 정중히 청했다.
최실장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가 없이는 지금의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수가 없다.
부인 역시 내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언제나 경호원들을 대동하는 생활,
그들이 지켜야 할 대상이 위험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결국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와 감사가 뒤섞인 마음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최실장 가족을 위해 나는 내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의 빌라를 마련해주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명의까지 넘겨주었다.
경호원들은 모두 미혼이라 함께 서울로 오기로 했다.
그들에겐 현재 연봉의 두 배를 제안했고, 누구도 고민하지 않았다.
12월 1일.
내가 태어나고, 자라나고, 웃고 울었던 시골을 뒤로하고 드디어 서울로 향했다.
변호사는 연로한 터라 아들을 보냈고,
나는 지금까지 함께해준 그들 모두에게 충분한 보수를 지급했다.
오랜 인연들이었기에 마지막 인사도 묵직했다.
점심 무렵, 남산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처음 보는 일하는 부부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사진으로만 봤던 이들이었다.
집은 네 채로 구성되어 있었고,
별채에는 경호원들과 일하는 부부가 살 예정이었다.
1500평의 넓은 대지 위에 자리한 집은 조용하고, 묵직하고, 고요했다.
명동 사무실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이다.
변호사 가족의 집도 근처에 마련해주었다.
대를 이어 나를 돕는 사람들,
그들 역시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녁, 가족 같은 이들이 모두 모여 10명이 둘러앉아 바베큐를 구웠다.
소고기, 삼겹살, 그리고 양주.
오랜 시간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불 앞에서 천천히 녹아들었다.
담장은 높고, 밤공기는 차고, 눈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그 자체로 낭만이었다.
밤 9시 반이 되자 파티는 끝났고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하루는 쉬자고 말했다.
11시에 잠들고, 눈을 뜨니 새벽 5시이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명동의 어느 작은 상가이다.
1층 남자,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딸아이.
그런데… 그 여자가 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김지영이다.
또 다른 내가, 꿈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9시, 나는 최실장을 불렀다.
“명동으로 보냈다. 꼭 가봐야 할 것 같네.”
"네 아가씨."
꿈인지, 예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운명 같은 끌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곧, 무엇인가 큰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실장이 돌아간 뒤,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집 뒤편으로 이어진 산길은 새벽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발 밑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미끄러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단단했다.
소나무 가지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 입에 머금어보니,
차갑고 달큰한 맛이 혀끝에 스며들었다.
경호원들도 서울 생활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이 산바람에 묻혀 은근히 따뜻하게 들렸다.
문득 수녀님과 함께 걸었던 금성산이 떠올랐다.
그 산의 흙냄새, 나지막한 바람, 그리고 어릴 적의 내가 함께 떠올랐다.
시골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와 산다는 건 분명 낯설겠지만,
그 낯섦이 주는 설렘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주식은 컴퓨터로 계속 하고 있었지만,
서울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장비 사양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오후 무렵, 최실장이 다시 찾아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대로 알아봤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하는 업체가 있다고?”
“네. 아버지는 명동 사채시장이 시작되던 시절부터 있던 분이고…
딸은 대학 졸업 후 아버지에게 배우는 중입니다. 명동 사채의 대부로 불립니다.”
“직접 만나보긴 했어?”
“네… 그런데…”
그가 말을 흐렸다.
나는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기다렸다.
“…딸이 아가씨하고 쌍둥이처럼 똑같습니다. 이름도… 김지영입니다.”
순간 숨이 멈추는 듯했다.
“뭐야…”
목이 바짝 말랐다.
“영업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입니다.”
“내일도 더 알아봐.”
“네, 아가씨.”
방에 홀로 않아, 문득 어젯밤의 꿈이 떠올랐다.
명동 어딘가의 작은 상가이다.
아버지와 딸.
그리고… 나와 똑같은 얼굴이다.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세상 어딘가에 또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막연한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역시 최실장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점심 무렵,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같이 가보자.”
“네, 아가씨.”
12월의 명동은 냉기마저 날카롭게 느껴질 만큼 추웠다.
청바지 위에 입은 검정 코트, 회색 목도리, 장갑, 그리고 마스크.
몸을 단단히 감싸고 차에 올랐지만, 떨림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명동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경호원들은 근처 커피숍으로 보내고 최실장과 둘이 상가로 들어섰다.
문 앞에서 잠시 숨이 막히듯 멈춰섰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괜찮아.”
쇼파에 앉자마자 남자가 묻는다.
“손님, 3일 동안 왜 우리 가게만 자꾸 오시는 겁니까?
돈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때, 딸이 차를 내왔다.
그녀가 내 앞에 서는 순간, 나는 세상을 잃은 듯한 충격에 잠겼다.
머리 모양, 차림새, 체형, 눈빛까지.....
나였다.
나와 똑같았다.
“아버님이 명동 사채시장에 오래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30년 넘었으니 오래 됐지.”
“따님이신가요?”
“그래, 우리 딸 김지영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나도 김지영입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 사시는 곳이 산 밑, 담장이 회색인 그 집인가요?”
“맞는데… 어떻게 아시오?”
그녀의 눈이 커졌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도 몰랐다. 왜 알고 있는지.
순간, 나는 결심했다.
“어르신께 투자를 하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얼마나?”
“어르신이 원하시는 만큼 입니다.”
“젊은 아가씨가 농담하나. 천억 투자할 거야?”
“…네. 천억 투자할게요.”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멈춘 듯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헛소리하지 말고 가.”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 묘한 긴장이 숨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저… 저기 30층짜리 건물, 제 소유입니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나를 훑어보았다.
“새로 젊은 여자가 샀다고 하던데, 그게 아가씨인가?
부모 잘 만나서 돈이 많은 모양이네.”
“저… 고아입니다.”
그 말에 어르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오늘은 가고… 내일 다시 오시오.”
“네, 어르신.”
“내일 점심 같이 하세. 12시까지 와. 지영이도 같이 먹고.”
“네. 내일 기다릴게요.”
가게 문을 나서며 나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한참을 걷다가 뒤따라오는 최실장에게 물었다.
“최실장.”
“네, 아가씨.”
“너 눈에는… 몇 퍼센트나 일치하냐?”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제가 보기엔… 100% 일치합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다리가 힘을 잃었다.
명동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소리도 숨도 감정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이 되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겨우 눈물을 멈추고 일어섰을 때, 바로 앞에 작은 술집 간판이 보였다.
닭볶음과 함께 술을 시켰다.
최실장도 경호원들도 아무 말 없이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소주를 혼자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따랐다.
세 병째를 비우고 나서는 기억이 뚝 끊겼다.
눈을 뜨니, 집 침대였다.
어떻게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찾다가 결국 가스레인지 불로 불을 붙였다.
유리창을 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밀려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분명했다.
그들은 내 과거의 사람들이다.
아버지… 그리고 또 다른 나.
그렇다면—
왜 나는 ‘사형’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걸까?
연거푸 담배 두 개비를 태우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새벽 6시이다.
도우미 아줌마가 해장국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서늘하게 흩어진 생각들이 물속에서 조금씩 가라앉았다.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나니 몸이 한결 따뜻해졌다.
8시 30분에 나가자고 말했다.
오늘은 어제와 전혀 다른 옷을 골랐다.
검정 스타킹에 빨간 원피스, 보라색 코트와 분홍 스카프, 그리고 검정 구두이다.
악세서리는 귀걸이만 착용하고, 립스틱은 은은하게 발랐다.
명동에 도착하니 길가의 작은 오뎅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만원어치를 사서 따뜻한 김을 들고 걸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나, 김지영을 만나러 걸어갔다.
전태현의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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