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스쳐가는 사랑의 파편들

by 전태현 작가

최 실장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호텔로 돌아왔다.
내 옷에는 짙고 강렬한 색의 피가 묻어 있었다.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는 샤워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온몸을 씻어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난폭하게 흩날렸다.


거울 앞에 서서 벗겨진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감각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여자 경찰서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도 말없이 옷을 벗었다.



따뜻한 물줄기 아래서,

그녀는 내 몸에 비누를 묻혀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작은 손짓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바디샤워의 거품이 우리 몸 위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말 한마디 없이, 거품이 흐르는 몸을 서로 안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며 가방을 내밀었다.
안에는 현금 2억 원이 들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전부 찾아내서 구속시켜. 끝나면… 인사 더 하지.”
“네, 아가씨.”



그녀는 가운을 벗고 속옷과 옷을 하나씩 걸쳐 입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역삼각형으로 벌어지는 그녀의 등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시선은 자연스레 허리와 허벅지로 이어졌다.
‘참을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만족이 차올랐다.



그녀 역시 내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우리는 밀착된 채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나눴다.
갇혀 있던 감정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여자 서장도 이제는 돈과 권력의 맛을 알아버렸다.



내가 건넨 돈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녀는 이미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수족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아주 잘 만들어 놓았다.



나를 죽이라고 사주했던 두목은 검거되었다.
다른 조직 두목 두 명은 도주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수해야 형량이 줄어드는 법이다.
지금 시대엔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세상이니까.

이번 사건으로 수많은 조폭들이 구속됐다.



계보도 없던 한 여자가 광역시를, 소리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통일해버린 것이다.
나의 입지는 이제 반석처럼 단단해졌다.
돈과 두뇌를 혹사시킨 결과였다.



그리고 이것이 전설의 시작이었다.



얼마 후, 최 실장이 퇴원했다.
의사는 최소 2주는 더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날, 최 실장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놈들은 최 실장이 혼자 있다는 정보만 믿고 덤벼들었지만,
그들은 내 경호원 최 실장의 실력을 너무 우습게 봤다.



나는 큰 빚을 졌다.
아니—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다.

이제는 경호팀을 만들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1년후...

그날의 피비린내 나는 사건 이후, 조폭 조직은 거의 와해되었다.
남은 자들은 내가 받아주었고, 나에게 앙심을 품은 자들은…
최 실장과 여자 서장이 말없이 처리했다.

관리는 최 실장이 맡았고, 뒤는 검찰과 서장이 봐주었다.
사채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 시절 조폭들의 주 수입은 사창가, 주점, 룸살롱, 나이트클럽이었다.
조직원들은 알아서 벌어 먹고, 상납금만 올리는 단순한 시스템이다.
아직 건설 쪽으로 뛰어드는 조직은 없던 시대이다.
말 그대로 ‘주먹질로 먹고 사는’ 시절이었다.



나는 터미널 대민동 쪽 5층 건물을 통째로 매입해 사채만 굴렸다.
어디든 큰 터미널 주변엔 사창가가 몰려 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포주들이 여자 데리고 영업하던, 그런 시대였다.

정치인들과도 인맥이 생겼고, 검찰 라인도 완성됐다.
지역 국회의원들과 술잔을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조직적인 뒷배를 만들어낸 것이다.



특별한 점은, 국가대표급 운동선수 출신의 경호원 4 명을 갖춘 것이다.
최 실장이 총괄이고, 네 명은 각자 팀장이라 불렸다.
또 현직 형사 둘이 권총을 차고 동행한다.
여자 서장이 소개해준 인물들이다.
이제 나도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셈이었다.



복싱하던 내 동생은 4달 전 군대에 지원 입대했다.
백령도 근무라 자주 올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사지 여사장은—
그날 조서만 받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 후로 소식은 끊겼다.



1년 동안 주식 천억을 굴려 5천억을 벌었다.
일산과 분당에 산 땅은 천억짜리가 1년 만에 약 8천억으로 뛰었다.
사채 천억은 1천억을 더 벌어주었다.



지금 내 자산은…
1조 5천억 원이 넘는다.
사채 시장은 규모가 작아 큰 폭발력은 없었다.




1993년 1월 23살이 되었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는 해였다.
나는 나주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지냈다.
매일 같은 하루라 즐겁다기보다는 무감각에 가까웠다.

백령도에 있던 내 동생이 휴가를 나와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다 갔다.


바로 어제였다.

그는 더 강해진 몸으로 돌아왔고,
일주일 내내…
밤이면 밤마다 나를 재우지 않았다.

신혼부부 같았다.
눈만 마주치면 사랑을 나누었고,
둘 다 집에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군 생활 중 여자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 일주일은 지상 최고의 파라다이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천국 같은 시간 뒤에 남은 건,
내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 이상한 허탈감이었다.



일주일 동안…

얼마나 격렬했는지.
내장은 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나는 아마…
남자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오후—

최 실장과 변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서울로 출장을 보낼 예정이다.

명동에 들어갈 빌딩을 알아보라고 했다.

“20층이든 30층이든 상관없습니다. 집도 함께 알아보십시오. 넓은 걸로요.”

"네 아가씨."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는 서울로 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우나에 들렸다. 한증막에서 30분 넘게 땀을 빼고 나니 살 것 같았다.
때를 밀고, 마사지를 받고 나니 온몸에 혈액이 다시 도는 느낌이 들었다.
사우나에서 나오니 오후 3시이다.
저녁은 최 실장 부인 집에서 먹기로 되어 있었다.
가는 길에 아이 옷과 부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골라 샀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6시였다.



벨을 누르자 부인이 문을 열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어서 오세요.”

부인의 어머니도 와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머니 오신 줄 몰랐어요.”
“오후에 오셨어요.”

거실에는 상이 두 개나 차려져 있었다.



임금님 밥상이라 해도 손색없게 정갈하고 풍성했다.
어머니가 고기를 직접 구워 내 입에까지 챙겨주었다.

양주를 한 잔씩 나누고 있는데, 잠들어 있던 아이가 일어나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

“이모 왔어. 오랜만이지?”

아이는 너무나 예뻤다.
그리고 부인은 임신한 몸인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나는 봉투 하나를 부인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천만 원이었다.

“아가씨, 못 받아요…”
“이러면 안돼는데.....”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한 잔 더 마시고 잠들었다.

다음날 점심에는 국회의원과 식사 약속이 있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다 보니, 국회의원만 5명 정도와 친분이 생겼다.
돈은 인맥을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한 도구였다.



하지만 시골 생활은 답답했다.
목장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저 막막했다.
사람은 환경이 지배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아침이면 나주시내의 증권회사에 들렀다.



IMF가 올 것을 대비해야 했다.
현금을 쥐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내년에는 모든 부동산과 사채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대한민국 경제가 곧 멈추는 날이 올 것이다.

증권사 객장에 들렀다가, 옆 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곳 아르바이트 남자가 눈에 띄게 잘생겼다.
씨름선수처럼 체격도 좋았고, 나와 또래로 보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말을 걸어보았다.

“저녁에 나랑 술 한 잔 할래요?”
“저… 술은 잘 못 마시는데요.”
“그럼 밥 먹어요.”
“6시에 끝납니다. 앞에 소고기 집에서 뵐까요?”
“네.”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너무 쉽게 넘어온다.

증권 업무를 정리하고 사우나에 들렀다가 나오니 5시.

시간이 많았다.
다시 카페로 가서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묘한 기대감이 공기 사이로 번졌다.



6시가 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요.”

같이 걸어가는데 심장이 괜히 빨리 뛰었다.
손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5분쯤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소고기를 주문하고 술도 함께 시켰다.
내가 잔을 따라주자, 그가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술 못 마신다면서요?”
“마실 줄은 알아요. 근데… 여자들이 자꾸 술 마시자고 해서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잘생긴 남자는… 그래서 피곤하겠네요.”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근데… 사장님, 알아요?”
“어떻게?”
“저기 건물주잖아요. 예전에 스포츠 매장에서 알바했었어요.”
“아, 그래서 봤던 얼굴이구나.”

내가 잠시 머뭇거리다 묻는다.

“그럼… 돈 많아서 저 만나는 건가요?”

“사실… 저도 사장님이랑 밥 한 번 먹어보고 싶었어요. 가슴 설레는 미인이셔서…”

나는 그 말에 잠시 웃음을 머금었다.



“현재는 복학 준비 중입니다.”
“어디 대학이요?”
“서울에 있는 ○○대요.”
“와, 공부 잘했나 보네.”
“시골에서만 잘했죠. 서울 가니까 잘하는 애들 천지더라고요.”

밥을 먹고 호프집에 들렀다가,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집에서 양주 한잔 더 해요.”



그렇게 우리는 내 집으로 향했고,

밤새 술만 마시고 손 한 번 잡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그가 “아버지 건물이라 오늘은 알바 쉬는 날”이라고 해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전날처럼 또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렇게 둘은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가슴 설레는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복학할 시기가 되자, 그는 떠날 준비를 했다.
떠나던 마지막 날, 양복 한 벌을 선물했다.

나는 슬펐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는 아마도 내 몸이 기억하는 남자가 될 것이다.
예견된 이별이었기에, 마음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 스쳐간 남자였지만,
그는 내 공허와 외로움을 깊게 달래주었다.
서로의 살결이 닿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남녀가 만나 이렇게 행복하고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다음에 이런 사랑이 다시 온다면,
나는 놓치지 않고 꼭 붙잡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겨울 같은 고독이 천천히 내게 찾아오고 있었다.




전태현작가의 유튜브입니다.

https://youtu.be/49lt5A2FggY?si=BsqfJ4H_kzKON9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