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댈러웨이의 창' (저자 박성원) 감상문
‘창은 진실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라는 댈러웨이의 말에 나는 검색 창으로 그의 존재에 대한 진실을 엿보았다. 검색 창을 통해 댈러웨이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실재 존재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것이다.
실제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것들을 너무 쉽게 진실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돈다고 하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다. 우리 주위만 둘러보아도 그럴싸한 말로 허구를 진실로 포장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과연 우리가 보는 텔레비전과 신문에 넘쳐나는 정보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우리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일까?
소설에서 댈러웨이를 알기 전의 ‘나’는 분명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사내의 집들이에 가서 댈러웨이를 알게 된 후 ‘나’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나’는 자신의 사진이 온통 거짓투성이며, 진실이나 실제의 모습은 자신이 그것을 찍으려고 마음먹던 그 순간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같은 이유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 누구도 묻지 않는다.
댈러웨이의 사진이 정말 진실인지를. 어쩌면 사람들은 의심을 하면서도 표면으로 내 놓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회는 혼자 아무리 그 의심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믿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아 한다. '나'가 마지막까지 사내에게 댈러웨이의 진실에 대해 끝까지 물어보지 않은 것처럼 후회 할 것이 뻔한데 말이다.
결국 ‘나’도 세상도 모두 댈러웨이 중독자가 된다. 어느 누구도 댈러웨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댈러웨이 사진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면서도 모두들 댈러웨이에 대해 한 마디라도 더 떠들어대고 싶어하는 댈러웨이 중독자로 가득찬 세상. 그 세상에서 사내 혼자 슬퍼하고 외로워한다. 그는 세상이 허위, 그것도 거대한 거짓에 중독되었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는,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세상으로 말이다.
댈러웨이의 <미지의 창>에서 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없는 사실도 완벽하게 만들어낸다는 사내의 컴퓨터도 <미지의 창>을 분석하지는 못했다. 그 사진에는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어쩌면 사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진실을 말해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미지의 창>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진실을 보면서도 그것을 의심하고 때로는 그것이 진실임을 알아도 모른 척 한다. ‘나’의 말처럼 세상은 거짓을 진실로 알고 있고, 그것만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제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에 괜히 마음이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