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범 단편
보지 않고 처박아 두었던 팸플릿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전시장은 인사동에 있는 한 갤러리였다. 나는 무작정 인사동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냥 지수의 사진을 다 태워버릴까? 아니야. 이 기억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 버린다면 나의 죄책감도 사랑의 아픔도 모두 사라지겠지만,지수와 함께 했던 행복한 순간들까지 모두 사라지고 만다. 행복했던 순간. 내게는 그녀와 처음으로 저녁을 먹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남자는 이상주의자라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그럼 여자는 현실주의자라는 건가요?”
지수는 살짝 코웃음을 쳤다.
“남자는 이분법적이기도 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아~남자를 싫어 하시나봐요?”
그녀는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내가 디저트로 뭘 먹겠냐고 물어본 후에야 불쑥 말을 내뱉었다.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아요.”
“항상 중립을 지키시는 군요.”
내가 하하거리며 웃자, 물을 한 모금 삼킨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남자가 아니니까요.”
마무리를 미소로 장식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수 씨는 정말 못 당하겠어요.”
지수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인사동에 다다랐다. 팸플릿에 적힌 주소를 찾아 터벅터벅 걸었다. 추억의 한쪽구석으로 따라 가버린 그 거짓말. 지수의 곁에 있고 싶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쌓았던 나의 종말은 결국 실연의 아픔으로 더욱 짙어진 외로움이었다. 내가했던 거짓말의 보상은 나에게 너무 무거웠다.
만약 솔직한 나였다면, 좀 더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면,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까? 지수가 놓았던 손을 한 번 더 잡고 싶었다.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전시회를 하는 건물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진 후였다. 하지만 지수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전시장은 2층 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통해 문고리가 살짝 나와 있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 앞에 이상한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옥이라니? 전시회 주제가 지옥이었나? 기분이 썩 유쾌하지가 않아 그 메모를 찢어버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자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전시장은 온통 검은색의 배경에 검은 액자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엉망인 전시회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녀가 전시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전시장에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전시된 사진들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낯익은 사진들이었다. 사진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나의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쪽에는 촬영한 날짜가 찍혀 있었는데 그 날짜를 미루어 보았을 때 내가 유나를 만나기 훨씬 전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진으로 시선을 옮길 때마다 날짜가 조금 씩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수는 어떻게 유나의 옛날 사진을 구했을까? 이 사진으로 유나에 대한 나의 기억을 깨우고 싶은 것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벽 한 칸에는 유나와 내가 여행을 가면서 찍은 사진들이 있었고 사진의 마지막은 우리가 교통사고 난 사진이 있었다.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벽에는 나와 지수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 밑으로는 유나가 병실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사진이 같이 걸려 있었다. 유나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이 사진을 과연 누가 찍었느냐는 거였다. 지수가 유나에게 애인이 있다고 했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 애인이 찍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문 앞에 그런 메모를 적어 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옥? 유나가 지옥에 빠졌다는 뜻인가? 그래서 나의 거짓말과 잘못을 깨우쳐 주려고 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혹시 지수와 유나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맨 마지막 액자 앞에 섰다. 그 액자는 전시회 안에 있는 것 중 가장 큰 액자였는데,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천 앞에 또 하나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여기부터가 진짜 지옥입니다.]
나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떨리는 마음을 짓누르며 천천히 천을 걷어 냈다.
"으아아아아아악!"
그 사진을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유나와 지수가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들이 번들거리는 몸을 서로 껴안고 있는 사진이 매달려 있었다. 촬영된 날짜는 유나를 만나기 전 날짜였다. 나는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주먹으로 액자의 유리를 깨버렸다. 손에서는 피가 났지만 가슴이 더 저려오기 시작했다. 악마 같은 여자. 나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지옥에 빠져버린 것 같았다. 전시관의 모든 액자를 부쉈지만 그 사진의 모습은 내 기억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
지수는 근처에 있는 밀실에서 CCTV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액자를 부수고 사진을 모두 찢어버리고 있는 정배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밀실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탄 그녀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한 병실에 들어갔다.
지수의 눈에는 아직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나의 얼굴이 보였다. 지수는 유나의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병실 안은 어두웠지만 창밖에 비친 달빛 때문에 지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리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나야. 나 복수했어. 너 이렇게 만든 사람, 아무리 사진을 없애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평생 그 기억의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할 거야. 그 때 말렸어야 했어. 네가 나랑 헤어지고 이제 남자 만난다고 했을 때부터 너무 불안했어. 이것 봐. 결국 너 이렇게 만들고 도망쳤잖아.”
지수는 유나의 손을 놓고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에 올라가 그녀보다 조금 아래쪽에 같이 누운 체로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제 걱정 하지 마. 나는 너 버리지 않을 테니까. 꼭 지켜줄게.”
지수는 유나의 품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막 잠이 들기 전, 지수는 그녀의 가슴이 점점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art.4 끝)
by 2009.06